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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희 May 24. 2022

고무장갑 한 짝

남편의 출장으로 미국으로 온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3개월 출장이었기에 아직도 한국에 가려면 2달 하고도 2주가 남았다. 처음 온 해외 장기 출장이 아니기에 이번에도 야무지게 필요한 물건들을 잘 챙겨서 왔다. 그중에서 내가 가장 잘 가져왔다고 자부하는 물건은 고무장갑이다. 미국에도 고무장갑이 있다는데 영 불편하다는 후기를 유튜브에서 봤기 때문에 고무장갑을 새것으로 넉넉하게 두 짝 챙겨 왔다. 사이즈도 내 손에 딱 맞는 s 사이즈에다가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건 영 불편해서 손목에서 반 정도만 올라오는 고무장갑으로 사 왔다. 한 개는 당연히 설거지할 때 쓸 것이고 한 개는 청소할 때 쓸 것이다.       

       

그런데 지난주에 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남편이 출근을 하고 욕조 청소를 하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고 욕조를 닦았다. 그리고 걸래도 빨아 먼지가 있는 이곳저곳을 닦았다. 바닥청소에 세탁기까지 돌리고 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이제 다 했나 싶어 고무장갑을 벗으려는데 물이 너무 많아 좀 말리고 창고에 넣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심코 베란다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달라스의 더운 날씨라면 5분이면 충분히 마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다가 고무장갑이 건조 중이란 사실을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날따라 그 드라마가 왜 이렇게 재밌었는지 2편을 연달아 보고 나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이것저것 꺼내 대충 한 끼를 챙겨 먹었다. 그리고 문득 창밖을 봤는데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고 있었다. 한바탕 비라도 쏟아질 참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틈틈이 쿠키도 만들어 구우며 남편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오늘은 쿠키가 평소보다 좀 더 맛있게 된 것 같아 뿌듯해하며 연신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도 찍어댔다. 그러자 마침 퇴근한 남편에게 갓 구워 나온 쿠키를 한입 맛보라며 내밀었다. 맛있다며 쌍엄지를 내밀어 보이는 남편을 보고 흐뭇해하며 같이 저녁을 차려 먹고 다시 창밖을 보니 비가 조금씩 쏟아지고 있었다. 달라스에서 비 오는 것을 별로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시원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하고 하루가 마무리되었다.     


이쯤에서 다들 고무장갑의 행방이 궁금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그다음 날이 되어서야 고무장갑의 행방을 찾았다. 다음날 남편이 출근하고 나서 다시 그 고무장갑을 껴야 할 순간이 오자 경악하며 베란다로 나가보았지만 베란다에는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깔끔하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내가 고이고이 한국에서부터 챙겨 온 고무장갑인데 비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아니 초기 치매가 아니고서야 왜 그걸 잊었냐며 나를 꾸짖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맞은편 건물 주차장 쪽에서 내 고무장갑과 비슷한 색깔의 손 한 짝이 보였다. 저것이 내 것이 맞는지 실눈을 치켜뜨고 쳐다보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 길로 나는 밖으로 뛰어나가 그것이 나의 고무장갑이 맞는지 확인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정말 어제 베란다에 널어 논 나의 왼쪽 고무장갑 한 짝이었다. 그렇다면 다른 한쪽도 이 근처에 있다는 건데 도대체 어디 있을까.라고 중얼거리며 고무장갑 한 짝을 들고 나는 아파트 한 바퀴를 다 돌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한 짝은 보이지 않았다.      


이러면 환경오염을 한 것 같은 죄책감이 들어 더 속상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혹여나 아파트 단지 어딘가에 떨어진 오른쪽 고무장갑이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찾아봤지만 결국 찾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사 온 고무장갑은 색깔도 살색이라 멀리서 보면 좀 섬뜩해 보일 수 있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달라스의 날씨는 한국과 많이 다르다. 그냥 온도를 떠나서 바람이 항상 많이 불고 며칠 차이로 온도가 오르락내리락 편차가 심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아마도 그 한 짝은 다시는 찾지 못하겠지만 제발 누군가가 잘 주워 버려 주었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크게 환경오염에 동조한 것 같아 마음이 너무 불편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짝은 이제 쓸모가 없어진 것 같아 어찌해야 할까 고민이다. 게다가 불편하다는 미국 고무장갑을 결국은 사야 하는 운명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무장갑을 버린 건 아닌데 버린 게 돼버린 나의 건망증을 원망해야지 어쩌겠어. 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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