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2학년 때 교과서에 나오는 소설의 뒷부분을 이어서 써오는 과제가 있었다. 당시에 나는 선생님이 알려주는 것을 이해하고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이였다. 그런데 나보고 상상해서 창작을 하라고?
처음에는 뜨악이었지만 다가오는 마감일에 과제를 생각할수록 묘한 희열을 느끼는 나를 발견했다. 과제를 하기 위해 억지로 책상 앞에 앉아 소설의 뒷부분을 상상하자 머릿속으로 술술 그려지는 이야기가 있었다. 말 그대로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반영해 내가 주인공이라면 이렇게 하겠지. 라며 내 마음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다 보니 과제가 재밌다고 생각했다. 과제가 재밌다니. 평생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그때의 나는 소설의 뒷부분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주인공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방식으로 뒷이야기를 꾸며서 제출했다. 그리고 그다음 수업시간에 나는 이름이 불렸다. 선생님은 내가 쓴 글을 아이들 앞에서 읽어달라고 하셨다.
처음에는 내가 뭔가 잘못한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낭독 후 선생님은 무한한 칭찬을 해주셨다. 세상을 살면서 그렇게 대외적인 칭찬을 받아본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글을 쓰는 삶에 대한 희열을 맛본 적이 몇 번 있는데 그중 가장 큰 희열이 바로 그때였다. 그것을 계기로 나는 쭉 글 쓰는 삶을 꿈꿨다.
중, 고등학교 때 공모전이란 공모전에는 다 나가보았고 대학교도 문예창작과를 지원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으로 지원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일을 10년 넘게 하고 나서도 글 쓰는 삶에 대한 목마름이 가시지 않아 브런치에 지원하게 되었다. 브런치를 시작한 지 5개월이 넘은 지금 고작 칠십여 개의 글을 쓰고 내보일만한 큰 획득이랄 것도 없다. 그래서일까. 문득 처음 썼던 내 글을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처참했다.
처음 썼던 글을 다시 읽어보자 나의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나는 도대체 왜 그동안 글을 쓰고 싶어 했는가. 고작 이런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는 글을 쓰자고 평생 동경한 것이 맞는가. 그 생각이 든 순간부터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자괴감에 빠졌다. 노트북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지옥 같았다. 내가 쓴 글자 하나하나가 모두 하찮아 보였고 쓸모없어 보였다. 내가 동경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렇게 자괴감의 늪에 빠져 일주일을 허덕이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항상 바쁘게 소재를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생각하던 내가 모든 걸 내려놓자 진짜 내가 보였다. 이북리더기도 책도 브런치에도 들어가지 않고 활자란 것은 읽지 않으려 노력했다. 유튜브, 넷플릭스, 영화, 드라마, 예능을 보며 시간을 보냈고 글자가 아닌 영상에 파묻혀 활자를 하나도 읽지 못하는 사람처럼 지냈다.
그렇게 무수히 돌리던 채널 속에서 어느 유명 작가의 인터뷰를 보게 되었다. 유명 mc는 작가에게 질문했다.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그 작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작가란 거창하게 책을 낸다거나 등단하는 것도 작가지만 자기 스스로 작가라고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작가라고 소개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작가가 됩니다'라고. 그 인터뷰를 보고 나는 헉 소리를 육성으로 내뱉을 만큼 깜짝 놀랐다. 내가 나 스스로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아무도 날 작가라고 인정해주지 않는구나.
그때부터 하루에 한 번씩 나는 나에게 혼잣말을 한다. ’ 나는 작가다. 글을 사랑하고 쓰는 작가다 ‘ 신기하게도 이렇게 최면을 걸기 시작하면 노트북과 마주 앉아 있는 것도 빈 한글 창을 띄워 놓는 것조차도 설래이기 시작한다. 비록 지금 내가 할 말이 없어 괴롭고 내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따라오는 창피함은 여전하지만 나는 하루에 한 번 나에게 최면을 건다.
나는 작가다.
누가 뭐래도 글을 사랑하고 쓰는 작가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언제든지 작가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