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미국 장기출장이 결정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번 기회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보자였다. 평소 영어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해왔지만 나의 부족한 실행력으로 실천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 흔한 영어학원이나 전화영화를 시도해 본 적은 없지만 이번 기회에 외국인들과 매일 영어를 해보며 간단한 생활영어 정도는 할 수 있게 만들자고 말이다. 그래서 미국에 가기 전부터 유튜브로 ‘친절한 대학’을 들으며 열심히 따라 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혼자서 영어로 바꿔보고 맞는지 확인하는 연습을 계속했다. 하지만 막상 미국에 살기 시작하니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나는 말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이러지 말고 아파트 주민들과 소통하거나 나가서 누구라도 대화할 기회를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그 후부터 나는 미어캣처럼 하루 종일 베란다를 들락거리며 주변에 인상 좋은 사람이 산책 나오기를 기다렸다.
기다리면서 수많은 상황을 예상해 보고 무슨 말을 건네볼지 소재를 생각했다.
내가 생각한 첫 번째 소재는 바로 날씨 이야기. 'The weather is so nice', 'It's so hot today' 등등 머릿속으로 수없이 읽어보고 자연스럽게 말하기를 노력했다. 하지만 날씨 이야기의 단점은 더 이상 뒷 이야기를 이어가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물론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에겐 쉬운 얘기겠지만. 날씨 이야기는 그냥 이야기의 물꼬를 트는 정도였다. 그리고 두 번째 소재는 강아지 이야기였다. 미국에는 반려동물이 정말 많다. 그래서 산책하는 사람들을 자주 마주칠 수 있고 옷가게나 식당에도 강아지를 데려오는 일이 왕왕 있다. 나 역시 강아지를 키우고 있기에 강아지를 빌미로 이웃들과 말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연결고리였다. 'The puppy is cute', 'How old is the dog?', 'What's the name of the dog?' 등등 소재도 넘쳐났다. 게다가 상대방의 강아지에 대해 물으며 나의 강아지에 대해서도 설명할 수 있었다. 한 번에 끝나는 대화가 아닌 그나마 대화 같은 대화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바로 아파트 관리인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미국의 일반적인 아파트로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아파트 관리인이 와서 수리해주거나 손을 봐주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집안에 무슨 문제가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이 메일을 보내고 직원이 오면 이것저것 말을 붙여 보았다. 그리고 네 번째 소재는 집 근처 쇼핑몰이나 커피숍에 가서 물건에 대해 직원에게 질문하거나 음료 주문하기! 이것은 앞의 대화들과는 다르게 비용이 들기도 하고 물건에 대해 물으려면 궁금한 것이 있어야 하므로 자주 시도해 보지는 못했다.
이렇게 나의 계획은 소박했지만 나름 거창했다. 하지만 극강의 I인 내가 외국인에게 말을 걸기란 쉽지 않았다. 일단 말을 붙이는 데까지는 여차저차 성공한다 쳐도 그 이후 내가 한마디를 하면 외국인이 한마디를 하면 끝. 티키타카가 돼야 질문도 하고 농담도 할 수 있지만 당황하면 한국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지고 외운 문장은 한 두 개가 다였으므로 그 이상 대화가 이어지기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하루 오늘은 누구에게 말 붙여볼까 고민하며 혼자 영어공부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미국에 온지도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우리 집으로 다른 사람의 우편물이 잘못 배달된 일이 있었다. 아파트 관리실로 걸어가면서 우편물이 잘못 왔다를 계속 외우며 마음을 다잡고 관리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웬걸. 직원이 우편물을 들고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Isn't that your mail?’이라고 대뜸 물어보는 게 아닌가. 그래서 나는 ‘yes!’를 말했고 직원은 ‘We'll take care of it. Leave it.’이라고 말했다. 수많은 단어를 되뇌며 갔지만 고작 예스라는 말밖에 하지 못하고 관리실을 나왔다.
한참을 되뇌며 다가간 외국인에게 고작 예스만 하고 돌아서다니 너무 허무했다. 공허한 기분에 나는 바로 집으로 들어가기 아쉬워 집 근처 스타벅스로 향했다. 음료라도 하나 사 먹으면서 말 걸어봐야지. 그리고 도착한 스타벅스에서는 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Are you ready to order?’ 나는 생각했던 음료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돌아온 직원의 질문. ‘Are you done ordering?’ 멍해진 나는 또 나도 모르게 ‘yes!’를 했다. 그리고 그 친절한 직원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Do you need a receipt?’ 결국 나는 세 번째 빌어먹을 예스를 했다. 예스 말곤 다른 말을 할 수는 없는 거니?
민망해진 나는 잔돈과 영수증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음료를 기다리려고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왜 고작 예스밖에 못하는 걸까. 아니면 고맙다는 말이라도 덧붙일 걸 그랬나. 그래 봤자 땡스다. 나는 왜 다른 나라만 오면 예스밖에 못하는 걸까. 미국에서 얼마나 살아야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을까. 말을 알아듣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걸까.
속상한 마음에 퇴근한 남편에게 오늘 예스밖에 못했던 일들을 털어놓았다. 남편은 한참을 웃더니 이렇게 말했다.
"미국에서는 예스만 하면 다 돼."
지금 위로하는 거 맞지?
어쩌면 고작 몇 개월 가지고 영어 실력을 확 늘려가겠단 허황된 꿈을 꾼 걸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쩌겠어. 그냥 오늘 하루도 노력하고 외국인에게 말 붙여보기 위해 아등바등 댈 수밖에.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예스 말고 다른 말을 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오늘도 나는 혼자 사부작사부작 영어 공부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