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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지애 Dec 06. 2019

어떤 글쓰기

아주 가득 채워진, 정말 아닌 게 아니라 기도까지 가득 찬 모양인지 숨까지 가쁜 그런 마음이 되곤 했지만 늘 아무것도 토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무엇이 될 건지 명명하는 것, 무엇이 되라고 확신하는 것, 그 어떤 것도 불가능했다. - 그래 나는 이 불가능에 대해서만 확신할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제목을 비워둔 채로 숨을 몰아 쉬고 있다.

나는 늘 의미와 유용에 대하여 병적인 강박에 시달렸다. 소비되는 모든 것, 째깍거리며 흐르는 시간, 호흡, 매번 시간에 맞춰 찾아오는 허기, 곱고 더운 옷가지며 사회적 동물로 어울리기 위해 필요해 보였던 것 같은 많은 일상품들 - 그런 모든 누적들은 내가 일생 갚아야 할 빚처럼, 아니 갚지 못할 빚처럼 무서웠다. 효율을 따지자면, 그냥 가난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가난하다. 그렇기에 모든 행위에는 유용과, 그도 아니면 의미가 있어야겠지. 이 강박은 한 때 무서운 지경까지 도달했다. 나는 나를 저울 위에 두고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몇 번을 되물어도 나는 아무 의미도, 유용도 없이 살아지고 있었다. 이건 미리 이야기해두지만 내가 이 세계에 얼마간의 이타성과 성취를 가지게 되는 것과의 별개의 문제다. 그러니까 자연과 또 그 자연에 자연 발생된 인간의 유용과 의미의 이야기이고, 여기에서 명쾌한 답을 가질 인간은 없을 것이다. (제발) 고민이 해결된 건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다. 엄밀히 말하면 해결된 것이 아니다. 그저 사라졌다. 인간의(나의) 유용을 따지는 문제의 유용을, 나의 의미를 따지는 일의 의미를 (역시) 찾지 못했기 때문에 긴 사춘기를 앓던 궤변론자도 함께 사라졌다.


의미를 찾는 일의 의미, 유용을 따지는 것의 유용,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의 정의, 불확실성에 대한 완벽한 확신, 완벽의 범주, 사춘기에 생겨난 상처의 딱지를 습관처럼 어루만진다. 결국 나는 언어가 가진 나약한 기호성- 같은 한글이되 이해될 수 없으니, 완벽히 기호화되지 못한 단어들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그럴싸하지 않는가? 읽히지 못하는 글이라는 건 (내가 긴 시간 집중해온-) 그렇기에 읽히지 못하는 글이라는 건 가장 나다운, 나의 존재 증명이 되어버린 셈이다. 나는 좁고 어두운 골목을 걸으며 승자처럼 콧노래를 불렀다. 가끔은 그 골목에도 아주 크고 환한 빛이 비추었고, 그 빛을 만약 실제로 마주했다면 아마도 우리는 조금도 소통되지 못했을 테지만 나는 그제서야 온전한 기분이 되었고 내가 글을 조금 더 써볼 수도 있는, 글도 우습다,( 애초에 내가 글 이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써 내려간 적이 몇 번이나 되었는가) 그저 어떤 조각을 남겨두는 일-에 대하여 유용을 찾은 것이다.

그런 마음은 첫 번째 독립출판물을 소개하는 글귀 어딘가에 조금 두었다. 무관한 행선지의 기차가 저 멀리서 대지를 흔드는, 오로지 바닥에 손을 짚고 누워있는 자만이 느끼는 미미한 진동,으로부터 느끼는 생의 위로, 그런 것이라도 될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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