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이 되니 몸이 예전같지 않다. 입맛도 시원찮다. 회사에서 점심도 깔짝깔짝 먹는 둥 마는 둥 하게 된다. 그저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서 조금 먹는다. '아 맛있다'하면서 음식을 먹어본 것이 언제인지... 그래도 살은 안 빠진다. 입이 심심하다고 먹은 간식 때문이겠지. 습관처럼 사무실 책상에 올려두는 봉지 커피 한 잔 덕분이겠지.
주말 아침 가족들은 아직 잠들어 있다. 거실에 멍하니 앉아 주방을 바라다본다. 코 끝에 어머니의 청국장찌개 냄새가 아려왔다. 냄새 안 나게 청국장 띄우는 법을 배우셨다면서 집에서 청국장을 담그시고는 했는데. 청국장과 고기가 듬뿍 들어갔던 고소한 청국장찌개 한 입이 간절해진다.
나에게도 이런 식욕이 있었나? 일단 반갑다. 사람이 먹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것이 이토록 평범한 일인데... 잊고 사는 것이 더 익숙하다. 오늘 왜 청국장일까?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끓여주시던 어머니의 청국장찌개 냄새가 그리웠을까?
어머니를 지금 바로 찾아뵐 수 없으니, 직접 손을 걷어붙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냉동실을 열어본다. 덩어리를 하나 찾았다. 오래된 화석같다. 오랜 기다림에도 그 묵직한 빛깔을 유지한 청국장 덩어리가 하나 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따각따각 도마위에서 양파를 반 개 썰어내려간다. 냉동실에 찌개용 돼지고기도 하나 있다. 오늘은 냉동실이 열일하는 날이다. 냄비에 식용유와 들기름을 조금 두른다. 고기와 양파를 노릇노릇 볶는다. 고소한 냄새에 식욕이 일었다. 냄비에서 타고올라온 냄새는 밤새 잠들어있던 위를 흥분시킨다. 영어로 아침 식사는 브랙퍼스트(breakfast)다. '깨다'라는 의미의 'break'과 '단식'이라는 의미의 'fast'가 합쳐진 단어다. 밤새 단식한 위가 고소한 냄새에 기지개를 켠다.
언제까지 재료를 볶아야 하는지는 모른다. 요리 초보자에게 어려운 것이 타이밍이다. 그저 느낌대로 할 뿐이다. 아내에게 어제 밥할 때 남겨달라고 한 쌀뜻물을 냄비에 붓는다. 부족한 요리 실력을 메꾸어달라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부어낸다. 달구어진 팬이 '치이익'하며 맛있는 소리를 낸다. 이제 귀로 허기짐을 느낀다.
된장과 국간장으로 간을 하고 아들 녀석이 좋아하는 두부를 조각조각 잘라 집어넣는다. 내 마음대로 잘라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음식을 만들 때는 내가 창조주다. 내가 조물주다. '생각보다 재미있는데?'
청국장 덩어리를 마지막으로 쏘옥 집어넣는다. 청국장은 서서히 냄비속으로 침몰해간다. 미국 영화배우 아놀드 슈왈츠제네거가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엄지속가락 치겨세우며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천천히 사라져간다.
맛있을까? 가슴이 동동거린다. 끊임없이 걱정이다. 파를 송송 썰어넣는다. 계란을 풀어 피자에 치즈 토핑하듯 휘익 두른다. '다글다글' 청국장찌개 끓는 소리가 듣기 좋다. 초겨울 아침에 듣기 좋은 ASMR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아이들이 하나 둘 일어나기 시작한다. 아내와 같이 상을 차려낸다. 피자 치즈에 익숙한 아이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로 맛을 표현한다. 청국장찌개가 '치즈처럼 고소하다'고 종알거린다. 언제부터 치즈가 맛의 기준이 되었을까? 치즈가 청국장처럼 고소한 것은 아닐까?
아빠와 입맛을 공유해주는 아이들이 고맙다. '다음에도 청국장찌개를 한 번 더 해도 되겠구나.' 그렇게 아빠의 요리 아이템이 하나 장착되었다. 아이들이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어머니도 이렇게 밥을 지으셨겠지... 그렇게 중년의 아빠는 밥을 짓기 시작한다. <끝>
[참고] ASMR : 자율 감각 쾌락 반응(Autonomous Sensory Meridian Response) : 주로 청각을 중심으로 하는 자극에 반응하여 나타나는 심리적 안정감, 쾌감 따위의 감각적 경험을 이야기한다. 최근 유튜버들이 다양한 컨텐츠의 ASMR을 생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