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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Aug 22. 2021

[28:19] 부동산 광풍의 시대에 서서

28:19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 (개)
열심히 일하는 농부는 먹을 것이 많아도 헛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가난하게 된다. (현)


[영] He who works his land will have abundant food, but the one who chases fantasies will have his fill of poverty.


[스] El que cultiva su tierra se saciará de pan, pero el que sigue a los ociosos se colmará de 

pobreza.

 * saciar 포식시키다, 싫증나도록 먹이다 / (공복/갈증) 채우다, 만족시키다 / se형 싫증나도록 먹다
 * ocioso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일 없이 있는  / 양성명사 무위도식하는 사람, 한가한 사람, 태만한 사람
 * colmar 타동사 (되, 큰 상자, 바구니 등을) 가득 채우다 / ~se형 (욕망이나 야망이) 만족되다, 채워지다


[이] Chi lavora la sua terra avrà pane in abbondanza, ma chi va dietro ai fannulloni avrà 

abbondanza di miseria.

 * lavorare  ( 1인칭 단수: lavoro ) 일하다, 작업하다, 노동하다.
 * diètro 부사 뒤에, 다음에  / 전치사 (공간적으로) 뒤에.
 * fannullone 남성형 명사 태만한 자, 게으른 사람, 빈둥대는 자. (=bighellone)

[포] Quem lavra sua terra terá comida com fartura, mas quem persegue fantasias se fartará de miséria.

 * fartura [파르투라] 여성형 명사 많음. 풍부. 풍족. 충만.  / 배부름. 만복(상태).
 * fartar [파르타르] 부르게 먹이다. 실컷 먹이다[마시게 하다]. 만족시키다. 욕망을 채워주다.


[불] Celui qui cultive son champ est rassasié de pain, Mais celui qui poursuit des choses vaines est rassasié de pauvreté. 
 * rassasié [ʀasazje] 배불리 먹은, 포식한 (=assouvi, comblé)


<양파파는 멕시코 노인 이야기>

멕시코 시티의 대형 시장 그늘진 한 구석에 '포타라모'라는 인디언 노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노인 앞에는 양파 스무 줄이 걸려 있었읍니다.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한 명이 다가와 물었습니다.

  "양파 한 줄에 얼마입니까?" 포타라모는 말했습니다. "10센트라오." 미국인은 다시 묻습니다.

  "두 줄에는 얼마입니까?" 포타라모는 말했습니다 "20센트라오." 미국은 또 묻습니다.

  "세 줄에는요?"  포타라모는 말했습니다. "30센트라오." 그러자 미국인이 말했습니다.

  "별로 깎아주시는 게 없군요. 25센트는 어떻습니까?" 

  "안되오!" 인디언이 말했읍니다.

  "스무 줄을 다 사면 얼마입니까?" 미국인이 물었읍니다.

  "스무 줄을 전부 팔 수는 없소." 인디언이 대답했습니다.

  "왜 못 파신다는 겁니까? 양파 팔러 나오신 것 아닙니까?" 미국인이 물었습니다. 그러자 인디언이 대답했습니다.

 " 아니오 나는 지금 인생을 살러 여기에 나와 있는 거요. 나는 이 시장을 사랑한다오.

   북적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람들이 어깨에 걸치는 모포를 사랑한다오.

   햇빛을 사랑하고 흔들리는 종려나무를 사랑한다오.

   친구들이 다가와 인사를 건네고, 자기 아이들 이야기며 농작물 얘기 하는 것을 사랑한다오.

   친구들 보는 것을 사랑한다오. 그것이 내 삶이오.

   바로 그걸 위해 하루종일 여기 앉아 양파 스물 줄을 파는 거요.

   한 사람한테 몽땅 팔면 내 하루는 그걸로 끝이오.

   사랑하는 내 삶을 잃어버리는 것이오. 그렇게는 할 수 없다오."




부동산 광풍의 시대다. '소유'에 모두 혈안이 되어 있다. 무주택자들은 주택을 사려고 눈을 불을 켜고 있다. 주택이 이미 있는 사람들로 다주택자가 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린다. 소유하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아파트 청약 당첨을 위해 '허위 입양'을 활용한다는 이야기도 공공연한 비밀이 된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집단적 욕심들이 부동산 광풍을 불러오고 있다.


내가 자유롭다고 이야기하지는 않겠다. 작년 말에 뒤늦게 상당한 지각비(?)를 내고 유주택자 대열에 합류했다. 이미 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온비드 공매를 기웃거린다. 저렴한 빌라가 나오면 사려고 정보를 찾아보고 있다. 왜 집을 사야하는 지에 대한 고민은 없다. 그저 지금의 부동산 광풍 대열에서 이탈하면 영원히 올라타지 못할 것 같아 두렵다. 욕심은 욕심을 낳는다. 건강한 노동보다 소유에 집착하는 내 자신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하루다. 


1990년작 영화 '미저리(Misery)'를 보았던 기억이 있다. 스티븐 킹의 동명 소설 미저리를 원작으로 한 영화다. 인기 소설가가 수수께끼의 여성독자에게 감금을 당하면서 모진 경험을 하게 된다는 내용의 영화다. 영어 misery는 라틴어 miseria에서 유래했다. '불행, 역경, 비참, 곤궁 /고통'의 뜻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어/이탈리아어/포르투갈어는 라틴어 스펠링 miseria를 그대로 사용한다. 프랑스어에서는 misère로 변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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