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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Sep 23. 2021

김 부장! 중국 주재원 다녀오게!

그런 날이 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그런 날이 있다. 뭔가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이다. 딱히 찝어 말할 수는 없지만 안갯속을 걷는 것 마냥 묘한 기분이 드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무슨 일이 생기려나?'싶어 조심조심 하루를 보낸다.


김 부장의 그 날이 그랬다. 인사팀장이 잠깐 보자고 했다. 인사발령 문제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인사팀장을 만나러 갔다. 기다리던 인사팀장은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서로 주먹을 퉁치는 코로나식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안부를 물으며 이야기를 열기 시작했다. 제법 이야기를 나누었다. 인사팀장이 이제는 시간이 되었다는 듯 본론을 꺼냈다. 


"부장님! 중국 주재원 나가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사팀장의 말이 가슴을 훅치고 들어왔다. 김 부장은 이미 주재원을 한 번 다녀오지 않았는가? 다시 주재원을 제안받을 것이라고 생각 못했다. 놀라서 말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게다가 중국이라니... 중국어는 문외한이다. 김 부장은 평소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를 공부해오고 있었다. 그는 주재원을 다시 나가더라도 영어권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했다. 중국은 생각도 못해본 곳이었다. 김 부장은 인사팀장에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주재원 위상이 예전 같지 않다.


해외주재원 [海外駐在員 , Expatriate]
글로벌 기업의 해외 현지 법인에 파견되어 근무하는 직원을 일컫는 말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최근에는 해외주재원 선호도가 예전만큼 높지 않다. 그 이유를 살펴보면 아래 5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해외 문화체험을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할 수 있다.(물론 최근 코로나 상황에서 해외여행이 제한되는 것은 별도로 생각하기로 한다.) 꼭 주재원으로 나가야만 해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해외 교육 환경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자녀들에게 충분하게 높은 수준의 영어교육을 시킬 수 있다. 고등학생을 둔 해외 주재원들은 방학에 2~3달씩 자녀들을 한국으로 보낸다. 한국의 영어 학원을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방학이면 자녀당 몇 천씩 쓴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럴 거면 주재원을 왜 나갔나 하는 푸념을 하기도 한다. 애매한 시기에 주재원으로 나가면 자녀교육을 망친다는 이야기들이 공공연하게 들려온다. 

자녀 대학 입시에서 재외국민 특별전형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것은 주재원 혜택 중 하나로 꼽혀왔다. 그런데 만혼이 늘면서 주재원 대상자로 꼽히는 직원 중엔 자녀가 아직 어려 특별전형 지원 자격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셋째, 최근에는 주재원을 경력 단절로 인식한다. 예전에는 주재원을 다녀와야만 임원으로 승진한다는 분위기가 있었다. 요즘 주니어들은 주재원을 경력 단절로 치부한다. 장기간 해외에 다녀오면 국내에 자리가 없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눈에 보여야 승진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임원 승진을 노리는 인재들이 주재원 발령을 꺼리기 시작했다.


넷째, 한국에서는 워라밸을 중시하는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저녁이 있는 삶, 주말이 있는 삶이 정착되고 있다.(물론 모든 직장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외 법인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아직 예전의 보수적인 기업문화가 남아있다. 아직도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는 법인들이 많다. 농업적 근면성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리더들이 남아있는 곳이 해외법인이다. 국내에 있으면 주 40시간 근무에 휴가 때 해외여행도 자주 가는데 주재원 생활에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한국에서 워라밸을 경험한 직원들은 해외법인의 과도한 업무량과 보수적인 기업문화를 부담스러워한다. 


다섯째, 가계 소득이 감소한다. 최근에는 맞벌이 부부들이 많다. 맞벌이를 하는 부부의 경우 해외발령으로 인한 배우자의 퇴직을 주저하게 된다. 주재원 발령이 나서 배우자가 퇴직하게 되면 가계 소득의 감소로 이어진다.


게다가 주재원도 선호하는 지역이 따로 있다. 유럽, 미국, 호주와 같이 주재원 거주 환경이 좋은 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인도, 멕시코, 브라질, 아프리카 같은 곳은 주재원을 선발하기가 어려워진 지 오래다. 특히 최근 중국의 경우 한국기업이 중국시장에서 고전하고 있다. 삼성, 현대를 비롯한 주요 기업들이 철수하는 분위기이다. 전체적으로 중국 법인의 성과가 좋지 않다. 중국 주재원을 기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중국 주재원으로...?


김 부장은 며칠을 생각했다. 왜 중국을 가야 하는가? 왜? 왜? 왜?라고 수 십 번을 되뇌었다. 주변에 믿고 의지하는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했다. 그리고 중국 주재원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첫째, 가족들의 100% 찬성이 있었다. 아이들은 이전 주재원 시절의 국제학교 생활을 만족해했다. 다시 국제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어 했다. 국제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김 부장의 아내도 해외 주재원 생활을 만족스러워했다. 해외에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한영스 포이프 독인.  「영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프랑스어, 독어, 인도네시아어, 중국어」의 머릿글자다. 김 부장이 평생에 걸쳐서 공부하고 싶은 언어들이다. 중국어도 언젠가는 공부하리라고 생각했었다. 생존을 위해 중국어를 공부한다면 성취도가 남다를 것 같았다. 김 부장은 '언어 취미 한 조각'을 채울 수 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셋째, 한국 부동산 광풍을 피해 도망간다. 미친 듯이 오르는 한국 부동산 시장 속에서 좌절하고 분노하기를 수 차례... 김 부장은 막대한 지각비를 내고 1주택자가 되었다. 김 부장의 인생 첫 집은 자신의 집이 아니었다. 사실상 은행 소유의 집이었다. 김 부장은 부동산 정책에 일희일비하고 유튜브의 부동산 콘텐츠를 기웃거리는 것에 지쳤다. 그만하고 싶었다. 광풍이 부는 한국 부동산 시장을 피해 해외에서 거주해보기로 했다.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어지러이 함부로 가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취는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터이니
- 서산대사


넷째,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김 부장이 가는 포지션은 중국 법인의 구원투수 역할이다. 이전에 없던 포지션이다. 새로운 길이다. 김 부장이 가는 길이 후배들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후배들의 롤모델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의미 있는 성과를 낸다면 후배들에게 가슴 설레는 도전의 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중국 주재원을 받아들였다.


다섯째, '어두운 곳에 따뜻한 희망이 되자.' '선한 영향력(善한 影響力)' 김 부장이 플래너에 적어둔 삶의 Mission(미션)이다. 남들이 이미 가꾸어둔 꽃길을 걸어가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기로 했다. 김 부장은 거친 길을 선택하기로 했다. 중국 법인 상황이 좋지 않다. 중국 법인과 직원들은 어두운 길을 걸어가고 있다.

김 부장은 돈을 많이 버는 일보다, 승진하여 성공하는 것보다 더 가슴 설레는 일이 있다고 믿는다. 자신을 불태워 누군가에게 희망의 빛이 된다면 그보다 더 설레는 일이 있을까? 주재원 기간동안 단 한 사람에게라도 희망의 빛이 된다면 그것만으로 족하다. 




휴일에 중국어 공부를 위해 도서관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책이 한 권 눈에 들어왔다. '이나모리 가즈오'의 <바위를 들어올려라>이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교세라를 성공적으로 경영한 경영자다. 65세 때 퇴임했다. 2010년 일본항공이 법정관리에 들어가자 일본 총리의 부탁으로 77세의 나이로 일본항공(JAL)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45개 적자노선을 폐지하고 1만여 명을 줄이는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조직을 효율적으로 바꾸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파산된 JAL을 8개월 만에 흑자로 돌려세웠다. 2년 연속 최고 실적을 낸 후 2013년 3월에 퇴임했다.


중국으로의 긴 여행을 앞두고 있는 나는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긴다.

일본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에게 길을 묻는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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