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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 May 22. 2022

주재원이 보고서를 잘 쓴다는 것

2022년, 대기업 해외법인의 주재원 숙소의 현실


"가족이 아빠의 주재원 숙소에 온 적이 있습니다. 와이프와 딸이 아빠의 낡은 남편 숙소를 보고 너무 고생한다고 마음 아파했습니다. 눈물을 흘렸습니다. 소중한 내 가족을 더러운 숙소에 도저히 재울 수 없었습니다. 인근 호텔로 데리고 가서 재웠습니다."

"숙소에 박쥐가 수시로 발견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발원이 박쥐라는 이야기에 불안했습니다. 퇴근 후에 숙소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

"겨울철에는 너무 추웠습니다. 여름철에는 더워서 잠을 못 잤습니다. 항상 컨디션이 좋지 않았습니다."

"물을 틀면 녹물이 나옵니다. 샤워를 하면 녹물로 몸을 씻는 기분이었습니다. 샤워하고 나면 몸이 가려웠습니다. 빨래를 해도 깨끗해지지 않았습니다. 누르스름한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세탁 후에도 옷에서 퀴퀴한 냄새가 납니다. 하루 종일 몸에서 불쾌한 냄새가 납니다."

"퇴근 후 낡은 숙소에 들어가기 싫어서 일부러 외부 일정을 잡았습니다. 술자리를 잡았습니다. 마사지를 들렀다가 집으로 갔습니다. "

- 주재원 인터뷰 중


김 부장도 주재원 숙소를 배정받고 깜짝 놀랐다.


20년 이상된 낡은 숙소였다. 겨울철에 샤워하고 나면 추위에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벽면에는 곰팡이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더러운 주방을 보면 음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2022년, 대기업의 해외법인에서 이런 낡은 숙소를 쓰고 있다는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50여 명에 이르는 주재원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톡 하고 손대면 터질 듯했다. 10년 이상 숙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서 체념하는 주재원들도 있었다. 일부 개인적으로 수리를 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았다.


주재원 숙소 외관



보고서를 쓰기로 했다.


문제를 풀기 위해 보고서를 썼다. 회사의 언어는 보고서다. 말로 설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좋은 보고서를 쓴다면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주재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보고서에 생생하게 담아냈다. 주재원들의 목소리가 본사에도 전달되어야 했다. 메인 페이지에 주요 이슈, 검토 의견, 소요 예산을 정리했다. 첨부에는 지원 프로세스, 세부 추진방안, 주재원 숙소 현황을 정리했다.


법인 경영층과 중국 재무부장을 설득할 포인트를 찾아냈다. 주재원 숙소를 변경해도 예산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낡은 숙소에서 불필요하게 들어가는 비용을 줄였다. 현재 운영 중인 총예산의 65% 비용으로 훨씬 좋은 아파트를 구할 수 있었다.  


법인 경영층과 중국 재무부장의 OK 사인이 떨어졌다. 보고서의 힘이다. 잘 정리된 보고서를 보고 흔쾌히 사인을 했다. 주재원들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기다렸다는 듯 주재원들은 숙소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주재원들의 감탄이 쏟아졌다. 새로운 숙소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곳이 아니었다. 그냥 사람이 살 수 있을만한 공간이었다. 오랫동안 낙후된 공간에서 살아온 주재원들에게는 천국처럼 여겨졌으리라...


이제 가족들이 아빠가 일하는 곳에 오면 부끄럽지 않게 와이프나 애들한테 보여줄 수 있습니다.

숙소 이사 후 깨끗한 환경, 깨끗한 물 등 기본적으로 사람이 살 수 있을만한 주거공간이 확보되었습니다. 퇴근 후 힐링이 가능합니다. 회사에 감사드리고 더 높은 성과로 보답할 수 있도록 업무에도 매진하겠습니다.

회사에서 퇴근하는 기분이 납니다. 퀴퀴한 냄새, 먼지 등이 없어서 쾌적합니다. 새로 옮긴 숙소는 여름, 겨울이 두렵지 않을 듯합니다.

집기 및 가구들 뿐만 아니라, 외부 환경이 바뀌면서 생활의 질도 높아졌습니다. 집에서 잘 쉬면서 다음날 출근이 상쾌해졌습니다.

출근 복장이 달라졌습니다. 전에는 숙소에서 작업복 대충 걸치고 출근했습니다. 이제는 아침에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깔끔하게 입고 다니게 됩니다.


주재원의 만족도가 대폭 개선되었다. 김 부장의 빠른 일처리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과분한 칭찬이다. 김 부장은 방법만 찾았을 뿐이다. 주재원들이 알아서 숙소를 구했다. 김 부장이 특별하게 한 것은 없었다.


그냥 보고서를 썼을 뿐이다. 내 보고서 덕분에 많은 주재원들이 행복해한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보고서를 잘쓰니 주재원 일이 솔솔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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