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지금의 직장에 입사했다. 사법고시에 실패하고 쫓기듯 들어온 직장이었다. 별다른 생각없이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사내에서 <이내화> 작가의 직장인 브랜딩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과 다른 나만의 직장인 브랜드가 필요하는 것에 공감했다.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다.
늘상 꿈만 꾸었다. 매년 쓰는 수첩의 첫 장에는 '올해 반드시 책을 한 권 쓰겠다'라고 적었다. 그 뒤로도 20년간 책을 쓰지 못했다. '왜 쓰지 못했을까?' 항상 변명이 있었다.
'바쁘니까 글 쓸 시간이 없다.'
'아직은 쓸 때가 아니다.'
'쓸만한 주제가 없다.'
'나는 책을 쓸만한 사람이 아니다.
책 쓰기를 20년이나 미루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가면 60세 정년에 이르러서야 책을 쓸 태세였다. 퇴직한 직장인 책을 누가 읽어줄 것인가 싶었다. 이제는 써야했다.
직장 생활로 바쁘면 쓸거리가 넘쳐난다. 평범한 직장 생활도 이야깃거리가 된다. 회사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글을 통해 표현될 수 있다. 회사에서 겪는 모든 경험들이 쓸거리가 된다. 회사에서 쓰는 보고서들조차로 이야깃거리가 된다. 상사와 후배들과의 관계는 좋은 글감이 된다. 글을 쓰면서 회사 생활이 모두 글감으로 보였다.
퇴근하면 노트북을 켜서 몇 문장이라도 두드렸다. 주말에는 가족들이 아직 일어나지 않는 새벽시간과 아침시간에 책을 써 내려갔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이 기적처럼 태어났다. 바쁘기 때문에 책을 쓸 수 있었다.
2022년 중국 주재원으로 온 후 너무 바빠졌다. 한국에서보다 최소 배는 바쁜 것 같다. 한국 본사에서는 협업하는 뛰어난 동료들이 있으니 일의 여유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뒤를 지켜줄 배후가 없다. 내가 뚫리면 끝이라는 생각에 항상 노심초사한다. 업무에 김 부장의 모든 시간을 갈아 넣고 있다. 이른 아침 출근하여 사무실 불을 켜고 일을 시작한다. 일을 끝내고 주재원 숙소로 돌아가면 바로 쓰러져 잠이 든다.
다시 비겁한 변명을 하고 있다. '주재원 업무가 너무 바쁘니 글 쓸 시간이 없다'면서 자위하고 있다. 뻔한 거짓말임을 안다. 퇴근 후에도 글 쓸 시간은 있다. 한 문장이라도 쓰면 된다. 주말에도 가족들이 일어나기 전 아침 시간에 글을 쓰면 된다. 다시 글쓰기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김 부장은 참 약한 사람이다.
중국은 10월 1일부터 10월 7일까지 국경절 휴일이다. 중국 코로나 정책이 워낙 엄격하다 보니 해외여행은 어불성설이다. 돌아오면 10일의 코로나 격리를 해야 한다. 그렇다고 국내 여행하기도 쉽지 않다. 아이들의 학교에서 타 지역 이동을 엄격하게 관리하고 있다. 가족 모두 집에서 쉬고 있다. 오랜만에 노트북을 켜서 글을 쓴다. 글을 쓰고 쓰다 보니 다시 생각났다.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쓴다'는 것이 비겁한 변명이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