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기획실 김 대리는 입사 5년차다. 올해 광명 공장에서 본사로 발령이 났다. 공장에서 기획을 한 것이 본사에 소문이 났다. 기획을 잘하는 대리가 있다는 소문 덕분에 본사 기획실로 발령이 났다. 본격적으로 기획 업무를 시작하고 많은 프로젝트가 주어졌다.
공장에서 근무할 때는 한 두가지 기획만 하면 됐다. 수첩에 상사 지시사항을 메모하고 업무 진행경과 몇 자만 끄적거려도 문제가 없었다. 진행되는 일들은 김 대리의 머릿속에 다 있었다. 머릿 속의 기억에 따라 일을 진행해도 일은 잘 진행되었다.
담당 업무와 기획해야할 과제가 많아지다 보니 머릿속으로 다 기억하지 못할 정도다. 기존 메모 습관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지경이다. 본부장/실장/팀장 지시사항, 다른 부서 협조 요청사항, 주기적으로 해야 하는 일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무엇이 중요한 일인지, 무엇이 급한 일이 판단할 겨를도 없이 일이 쓷아져 들어온다.
김 대리 책상위에는 검토해야 하는 서류가 하나씩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다. 김 대리는 눈에 보이는 급한일부터 처리할 뿐이다. 하나를 처리하고 나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급한 일이 생긴다.
한창 정신없이 인사팀 협조사항을 정리하고 있는데, 팀장이 자리에서 잠깐 보자고 한다.
“김 대리! 지난 번에 검토 지시한 ‘해외법인 네트워크 강화방안’은 왜 아직 보고를 안하지? 오늘까지 보고하기로 되어 있지 않나?”
가슴이 철렁하다. 눈 앞이 하얘지는 것 같다. 팀장 지시를 이면지에 메모해두었는데 종이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귀 밑까지 빨개지는 것 같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팀장님! 죄송합니다. 최대한 빨리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팀장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김 대리. 본부장님 보고가 필요한 사항이야. 나도 검토할 시간이 필요해. 언제까지 보고할거지?”
“내일까지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래 내일 봅시다. 빨리 검토해야 본부장님 보고를 드릴 수 있습니다.”
책상으로 돌아와 모든 서류를 제껴두고 팀장 지시사항을 작성하는 데 집중했다. 퇴근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내일까지 보고해야 하니 야근이 불가피하다. 밤 12시가 다 되어서야 초안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퇴근길에 나섰다.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겨우겨우 막차를 잡아탔다. 하루종일 일에 시달린 몸은 이미 파김치가 된 지 오래다.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졸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가니 아내는 잔뜩 화가 나있었다. 김 대리에게 오늘까지 처리해달라고 했던 공과금을 처리하지 못해서 화가 난 것이다.
“ 여보! 많은 것을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그냥 공과금 내달라는 것인데. 그럴 못해줘? 오늘 넘어가면 가산금이 붙는다고 했잖아. 작은 돈이라도 아껴야 집을 사지!”
김 대리도 화가 버럭 났다. 하루 종일 일에 시달리고 온 남편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잔소리라니' 너무 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빈둥빈둥거리다가 못 보낸 것도 아니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사람에 시달리다 보니 공과금 납부를 놓치게 된 것이다.
“그렇게 급하면... 집에서 놀고 있는 당신이 하면 되지! 하루 종일 일하고 온 남편에게 왜 이래?”
‘아차’ 싶었다. 이미 말은 입밖으로 나와버렸다. 요즘 아내는 이제 100일된 딸아이를 돌보느라 정신없다. 하루종일 아기를 돌보다 보면 자기 밥도 제대로 못 챙기는 것을 알고 있다. 밤에도 몇 번씩 깨면서 젖을 먹인다. 살이 쏙 빠지고 눈이 퀭한 아내에게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육아만 신경쓰라’고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겠노라’고 큰 소리를 쳤는데… 못된 말이 입밖으로 나와버렸다.
곁눈질로 본 아내 눈에 눈물이 핑 도는 것이 느껴졌다. 화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옹졸한 마음은 사과보다는 계속 화난 척 하게 만들었다. 이미 못된 말을 뱉은터라 주워담지도 못했다. 차마 아내 얼굴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숨듯 작은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불편한 마음에 자는둥 마는둥 하다 아침에 허겁지겁 회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