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전이다. 고시공부를 접고 취업을 하기로 했다. 2000년은 한국경제가 IMF에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취업시장이 회복되기 시작하던 상황이었다. 감사하게도 한국의 굴지의 그룹에 합격했다. 그 뒤로 24년간은 항상 불편한 발령이 이루어졌다.
하나, A사에 가다.
연수를 마치고 그룹의 2개 회사에 나누어 배정이 되었다. 필자는 A사에 배정이 되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당시 A사는 경영이 어려운 회사라는 이미지가 남아있었다.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둘, 법대생이 안전업무라니...?
A사 내에서 근무지가 결정되었다. 필자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본사 법무팀이나 일반 지원팀(인사, 총무)으로 갈 줄 알았다. 신입사원인 나는 공장으로 내려보내졌다.
마음이 불편했다.
공장에서는 안전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법대생이 공대생들이 담당하는 안전 업무라니...'
불편한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해보기로 했다. 산업안전보건법을 공부하고, 안전공학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모르는 것은 선배들에게 물어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했다. '김 사원이 제법 일하는데'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셋, 노무관리를 하라굽쇼?
안전 업무가 좀 익숙해질 무렵 다시 발령이 났다. 회사 노조를 담당하는 업무로 이동하라는 것이었다. A사 노조는 대한민국 노동계에서도 강성으로 유명한 곳이다.
마음이 불편했다.
'거칠기로 소문난 A사 노조 대응 업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스러웠다.
거친 노조를 상대하다 보니 노조를 담당 부서 선배들도 대부분 거칠었다. 노조와 한바탕 붙어도 밀리지 않는 강한 정신력과 일명 '가오'를 가지고 있었다. 회사에서 한 자락씩 한다는 선배들이 부서에 있었다. 현장 노조를 상대하다 보니 현장에서 착출 된 직원들이 많았다. 태도가 거친 선배들도 많았다.
거의 매일 술자리가 이어졌다. 퇴근 후에 노조를 만나 술 한잔 기울이며 속내를 나누는 것이었다. 술을 마셔야 사람을 알아갈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가서 토하고 다시 마시고를 반복했다. 술병이 나서 응급실에 실려가기를 2차례나 했다.
노조 간부를 만나면 '형님! 선배님!'이라 불렀다. 노조 간부들도 친근하게 동생처럼 다가오는 내가 싫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조금씩 마음을 열어주었다. 김대리를 '사측'이라는 생각보다는 회사 동생으로 대해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노무팀에는 일 잘하는 김대리가 있다.'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넷, 김 과장 본사 기획실로 오세요.
노무관리에서 커리어를 만들어가던 무렵, 본사 기획실로 발령이 났다. 기획업무를 좀 해보라는 것이었다. 특히 당시 회사의 조직문화가 무너진 상태였다. 직원들의 '2등 주의, 패배감, 무기력감, 도전의식 부재, 비전 부재'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회사의 조직문화를 만들어가야 했다.
'또 새로운 도전이야?'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안정될만하면 다시 새로운 부서라니...'
당시 본사로 와보니 쟁쟁한 선배들이 많았다. 기획력이 뛰어난 똑똑한 동료들이 널려있었다.
마음이 위축되었다. 열등감을 느꼈다.
'공장에서 잘 일하고 있는 나를 왜 본사로 불러올렸나?' 하면서 원망의 마음도 들었다.
그래도 회사의 조직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기획업무를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어떻게 보고서를 써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보고서 / 글쓰기' 역량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행사, 이벤트. 교육, 세미나, 워크숍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업무 역량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K사 기획업무가 너무 재미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생각도 했다.
'이렇게 보람이 있는데 돈을 내고 다니라고 해도 다니고 싶다.'
정말 그랬다. 준비한 기획서가 경영층에 보고되고 인정을 받았다. 기획한 이벤트는 대성공을 거두어 직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인정과 성과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었다.
'기획실에는 기획을 잘하는 김 과장이 있다.'라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다섯, 김 과장! 그룹 인사실로 올라오세요.
어느 날, 인사팀장이 면담을 하자고 연락이 왔다. 인사팀장을 만났다. A사가 속한 그룹 인사실로 발령이 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룹에서 글로벌 HR업무를 담당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당황스러웠다.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너무 만족하고 있는데. 한참을 의미 있게 일하고 있는데. 발령이라니...?'
글로벌 HR 업무를 시작했다. 글로벌 업무를 하다 보니 영어가 필수였다. 부서원들은 해외 유학파 출신이거나, 높은 영어 점수를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서 교양영어를 공부한 이후 영어를 손에 놓고 있었다. 영어는 너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너무 마음이 불편했다. 열등감으로 마음이 힘들었다.
그래도 이겨내야 했다. '한 번 해보자' 마음을 다 잡았다. 독하게 마음을 먹고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해외법인 직원을 만나면 말을 할 수가 없어서 긴장했다. 계속 공부하고 소통하니 조금씩 영어 실력이 향상되었다.
A사 기획실에서 육성된 기획력과 행사 진행능력은 그룹 인사실에서 빛을 발했다. 그룹 사장님께 일 잘한다는 평가를 직접 받을 정도로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여섯, 멕시코에 가서 법인을 만드세요.
한 조직에서 근속 4년이 넘어가면 슬슬 불안하다. '새로운 도전이 생기지는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나 인사팀장이 면담을 요청했다. 이번에는 멕시코였다. 멕시코에 새로운 법인을 만드는데 1기 주재원으로 가 달라는 것이었다. 멕시코 프로젝트팀에서 나를 콕 찍어서 발령을 부탁했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불편했다.
- '멕시코라니...? 나는 스페인어를 한 마디도 할 수 없는데...'
이제는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이 익숙해졌다. 도전해 보기로 했다. 멕시코 1기 주재원으로 파견되었다. 흙먼지 날리는 허허벌판 땅 위에 150만 평에 이르는 공장 단지를 건설했다. 멕시코법인의 역사를 만들었다. 23개월의 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마쳤다.
멕시코법인은 공장 건설을 마치고 준공식을 준비해야 했다. 법인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주재원이 행사를 담당해야 한다는 법인장의 의중이 있었다. 필자가 공장 준공식을 총괄하게 되었다. 다양한 조직을 거치면서 성장한 기획력과 행사 진행 능력은 멕시코에서 빛이 났다. 준공식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본사에서도 '역시 일 잘하는 주재원'으로 소문이 났다.
일곱, 중국을 좀 가줄 수 있겠어?
1기 주재원은 누구나 기피한다. 너무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국내에 복귀했다. 너무 힘든 4년을 보냈기 때문에 조금은 편한 곳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다. 또 인사팀장이 면담을 하자고 한다.
- '아 이거 또 발령이겠구나'
이번에는 중국이었다. 싸드 사태 이후 2017년부터 중국 법인 경영환경을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모두 중국을 가기를 기피하는 상황이었었다.
역시 마음이 불편했다.
'조금 편한 데로 가면 안 되는 것일까?'
이번에는 항변을 해보았다.
"영어 소통에도 문제가 없습니다. 스페인어도 구사할 수 있습니다. 기왕 발령내실 거면 영어, 스페인어를 활용할 수 있는 곳으로 보내주십시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결국은 중국 주재원으로 발령이 났다. 중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중국에서 다시 불꽃을 태우고 있다. 중국에서 변화와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다.
인생의 모든 것이 편안해진다면 우리는 그 안에 갇혀 절대로 성장하지 못한다.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지는 일을 해야 하고, 그 일이 편안하게 느껴질 때까지 계속 노력해야 한다.
편안함이 느껴지면 다시 불편함을 초래하는 또 다른 목표를 설정하자. 불편함은 우리가 성장하고 있으며 이전엔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고 있음을 시사한다.
밥 프로터 <부의 확신>
참 감사하다. 24년 동안 계속 새로운 도전을 했다. 불편함으로 나아갔다. 좀 편해질 만하면 불편한 곳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회사 인사를 원망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인사에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불편한 상황을 끌어당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지금은 좀 불편하다. 중국에서 업무를 하는 것이 만만치 않다. 나는 믿는다. 반드시 편안해질 것이다. 편안함을 느낄 때가 되면 떠날 때가 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