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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콩콩 Jan 06. 2018

책을 만들며

또 책 이야기

지난 두 달은 지루했다. 여유 시간 대부분을 만들고 있는 책에 부어야 했다. 다른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기 힘들었다. 친구와 저녁을 먹으면서도 편집중인 책이 자주 목에 걸렸다.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다니는 것도 지겨웠다.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데 원고만 열면 검토해야 할 것들과 고쳐야 할 것들이 쏟아졌다. 입만 떼면 만들고 있는 책 이야기가 나왔다. 책 말고는 할 말도 별로 없었다.


지난 두 달은 즐거웠다. 여유 시간에 할 일이 생겼고 약속 없는 주말을 아쉬워 하지 않아도 됐다. TV를 보거나 SNS를 들락거리는 시간이 줄었다. 친구에게 전할 근황이 생겼다. 일 말고 무언가에 긴 시간 집중한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편집을 하다가 두 번이나 밤을 샜다. 피곤했지만 졸리지 않았다. 책 이야기는 언제 해도 재미있었다.

읽고 또 읽어도 재미있었다 (나는...)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닌데 책 만들기는 주말 출근처럼 부담스러웠다. 동시에 월급날처럼 설렜다. 내 책이 세상에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은 당연히 없는데 어쩐지 완성만 하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다. 하지만 좋은 일이 생기지 않는다 해도 좋았다. 책을 만드는 지루하고도 즐거운 시간 동안 이미 얻은 게 많았다.


처음 만드는 책이라 처음 하는 것들이 당연히 많았고 ‘오! 이런 게 있었네! 아! 이렇게 하는 거였네!’ 하고 발견하고 감탄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나중에 책을 다 만들면 배우고 얻은 것들을 정리해야지 했는데 시간이 조금 지났다고 기억이 가물가물 해지기에 몇몇을 추려 기록으로 남긴다.


- 책을 다른 방법으로 보게 됐다.

이전까지 책을 볼 때 장르가 무엇인지, 누가 썼는지,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에만 신경썼다. 책표지 디자인 정도만 눈 여겨 보았을 뿐 책의 겉모습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는데 책을 만들려고 하니 전혀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책의 크기는 어떤지, 총 몇 페이지인지,  표지는 양장인지 무광코팅인지 유광코팅인지, 한 페이지에 여백은 얼마나 뒀는지, 책등에 제목이 세로쓰기인지 가로쓰기인지, 책 날개는 있는지 없는지, ‘가격’이라고 썼는지 ‘값’이라고 썼는지, 쪽번호는 좌하단에 뒀는지 우하단에 뒀는지 종이는 미색을 썼는지 백색을 썼는지, 간지는 몇 장이나 들어가 있는지, 펴냄이라고 썼는지 발행이라고 썼는지, 작가소개는 약력을 나열했는지 아니면 문장으로 서술했는지. 책을 만들지 않았다면 누군가는 분명 고민하고, 결정하느라 애썼을 영역을 살펴볼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세상엔 많은 네이비가 있음도 배웠지

- 만질 수 있는 보람

직업이 마케터라고 하면 “일 재미있어?”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 ‘일이 다 일이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다면 많은 일 중에서 왜 하필 마케팅을 하는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그 대답 중 하나가 내가 한 일이 나와 다른 사람 눈에 보이고, 반응도 즉각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은 심지어 만져졌다. 물성이 주는 보람은 물성이 없을 때보다 네 배쯤 큰 거 같다. 뭐랄까. 마치 보람이 만져지는 것 같달까. 가제본으로 내가 만들 책을 미리 만난 것도 좋았다. 일단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으니까 결과물을 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고 끝까지 해낼 힘이 생겼다.  

코팅의 소중함을 알려줬던 가제본1
사이비 단체가 나눠주는 책같은 색이라는 평을 들었던 가제본2

- 반성과 겸손

책을 만들려고 하니까 내가 가진 콘텐츠가 너무 흔하고 보잘것없어 기가 죽었다. 지인의 의리구매가 아니면 판매가 하나도 안될 것 같았다. 내가 봐도 내 책을 사야 할 이유가 없었다. 누가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쓴 검증 안된 일기를 읽고 싶어하겠는가. 많은 독립출판물이 그림이나 사진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일기도 그냥 일기가 아니었다. 매우 독특하고 재미있는 기획이 깔려있었다. 억지로 억지로 ‘어른’이라는 키워드를 끌어다가 책을 만들면서 글 좀 쓴다고 우쭐했던 지난 날을 반성했다. 내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에게 ‘부족한 책’ 이라 한 건 진심이었다. 내게는 분명 보람 찬 ‘내 새끼’였으나 그래서 내게만 함함한 고슴도치였음도 잘 알고 있다.


- 어쩌면 성장

몇 년 간 여기저기 써 놓았던 글을 다시 읽어 보니 ‘그 사이에 내가 많이 자랐구나.’ 싶었다. 오늘이라면 마음이 아프지도 화가 나지도 않았을 일로 오래 고민하며 글을 쓴 어제의 내가 귀여웠다. 나이를 헛먹지 않았음에 안도했다. 한편 그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쓸 수 없는 글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음이 아닌 지금 기록해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배웠다.


- 100명의 독자

지인과 예정된 서점 입고로 소진될 수량을 어림잡아 계산했더니 40-50권 정도였다. 딱 맞춰 인쇄하기 뭐하기도 하고, 비용도 별반 차이가 없어서 100권을 만들었는데 2주만에 절판이 됐다.(고작 100권에 ‘절판’같은 거창한 단어를 써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100명의 사람들이 내 글에 값을 지불하고 내 생각을 읽는다니 기분이 묘하다. 고맙고 미안하다. 부디 지불한 돈과 읽는 데 쓴 시간만큼은 가치가 있길 마음 다해 바란다. (+ 독자 중 몇몇은 리뷰를 남겨줬다. 그 리뷰로 글을 계속 쓰고 싶다는 용기도 얻었다)

송년회를 강제 작가와의 만남으로 만들었다. 참아줘서 고마워.


- 안 해보면 영원히 모르지만 해보면 한 번에 아는 것들

퍼블리셔(소프트웨어)의 존재, 상업적 완전 무료 폰트의 소중함, 113x188 쏜살문고 사이즈, 띄어쓰기 까막눈, 백색 모조지와 미색 모조지의 차이, 반누보 스노우화이트, 무광코팅의 촉감, 제단을 위한 3mm 여백, 세네카(책등), 양면 2도 인쇄는 흑백, 양면 8도 인쇄는 컬러, 모니터와 실물의 색 차이, 실물과 사진의 색차이, 인터프로 인디고, 책 한 권 제작비와 제작 시간, ‘어른’을 키워드로 한 책이 많다, ‘000의 일’이라는 제목이 많다, opp봉투와 안전봉투의 세계, 편의점 택배 이용법, 서울-대구간 운송비, 파워블로거의 파워, 인플루언서의 인플루언스, 입고메일 보내는 법, 전국의 독립서점 등등등.

옆모습도 참 곱네 내 새끼


<어른의 일>을 시작으로 그동안 말만 하던 <계간 손혜진>도 시작되었다. 이름에 걸맞게 2018년에는 꼭 분기별로 작은 결과물을 내놓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무엇이든 시작하면서 배우고 얻는 것이 있다. 그리고 시작한 일을 끝내면 그 다음 시작에 거름이 된다.  자, 그러니 책을 만들자. 시작을 하자.


그리고 중쇄를 찍었다. 2쇄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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