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를 쇱니다.
3년 전부터 하지를 기념하고 있다. 보통 양력으로 6월 22일인 하지(夏至)는 24절기의 하나로 낮이 가장 긴 날이다.
첫 해에는 회사 앞 식당에서 칭따오를 마셨다.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술을 마시니 마치 낮술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해가 떠 있었으니 오피셜리 낮술이 맞지만 낮술여부를 떠나 근무중 음주로 일탈하는 것 같았다. 두 번째 해에는 첫 해가 생각나 회사 동료들에게 “오늘 하지니까 꼭 해 떠 있을 때 맥주를 마시자”고 권했다. 하지만 야근을 했다. 11시에 겨우 일을 마쳤는데 기어코 동료들과 술을 마셨다. 태양의 기운이 아직 남아서였을까.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피곤하지 않았다.
세 번째 해였던 작년에는 작정을 했다. 하지를 맞이하기 며칠 전부터 적당한 사람, 장소, 시간을 물색했다. ‘하지를 쇠자.’는 나의 제안을 기꺼이 받아준 친구와 남산이 보이는 후암동 루프탑에서 약속을 잡았다. 약속시간은 7시. 우리는 남산을 등지고 저 멀리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블랑을 마셨다. 캬아.
그렇다면 올해는 하지를 어떻게 보낼까. 이 좋은 하지를 나만 특별히 보내는 것이 아까워 완벽한 하지를 보내기 위한 노하우를 공개한다. 9to6의 삶을 사는 서울 직장인을 기준으로 쓰여진 점은 양해 바란다.
하나, 하지를 좋아합니다.
하지를 싫어하면서 하지를 완벽하게 보내기는 어려운 법. 어제까지 아무날도 아니었지만 오늘부터 하지를 좋아해보자. 사실 나는 하지에 앞서 24절기를 좋아한다. 먼 옛날 하늘과 해와 바람을 가만히 가만히 보고 있다가 '아! 이 즈음에는 겨울잠 자던 개구리가 깨어나는구나!’, ‘일년 중에 낮이 제일 긴 날은 이날이구나! 하고 발견했을 누군가가 고맙고도 귀여워서 그렇다. “차갑게 얼었던 땅이 녹는다” 고 해도 될 텐데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깬다”고 하다니. 24절기(특히 경칩)의 뜻풀이를 한 사람은 분명 시인이었을 거다.
뜻풀이가 경칩만큼 시적이진 않지만 하지가 좋은 이유는 역시 낮이 가장 길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니 하지의 존재를 알게 된 어린시절부터 좋아했는데 해가 질 때까지 밖에서 실컷 놀 수 있어서 였던 것 같다. 어른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퇴근하고도 아직 놀 수 있는 해가 남아있다는 건 역시 조퇴한 기분, 낮술 먹는 기분, 일탈의 기분이다.
두울, 출근을 합니다.
일탈을 만끽하려면 우선 일상이 있어야 한다. 언제고 낮술을 먹을 수 있는 형편이라면 하지라고 특별히 신나기 힘들다. 물론 휴가를 쓰거나 오후 반차를 쓰고 여유롭게 하지를 맞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출근과 업무로 일상을 꽉 채우고도 해를 보며 퇴근할 때의 쾌감을 느끼려면 출근이 필수다.
세엣, 정시퇴근을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무엇보다 어려운 일일 수 있다. 하지만 하지의 정점은 해가 지기 전에 있다. 해가 진 뒤의 하지란 타종이 끝난 뒤의 보신각, 해가 뜨고 난 뒤의 정동진이다. 정시퇴근을 위해서라면 전날 야근도 불사하자. 팀원들의 협조는 미리 구하자. 팀원들의 공감을 얻으려면 6월이 시작되면서부터 하지의 중요성을 어필하는 것이 좋다. 다음은 인스타그램에 먼저 흘리면 좋은 문구이다. 해질녘 사진과 함께 게재하면 더욱 효과적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이유는 어딘가에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고, 6월이 아름다운 이유는 하지를 품고 있기 때문이지.”
“낮에 퇴근할 수 있는 유일한 달은 하지가 있는 6월뿐.”
네엣, 남산에 갑니다.
추석에 고궁에 가고, 크리스마스에 명동에 가듯 하지에는 남산에 가자. 반드시 남산일 필요는 없고, 해가 지는 장면과 6월 저녁의 선선한 공기를 누릴 수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 좋다. 그곳이 내게는 남산을 등진 후암동 일대다. 반드시 남산일 필요는 없지만 루프탑 또는 테라스는 필수다. 5월의 밤은 아직 춥다. 7월의 밤은 모기가 8월의 밤은 더위가 괴롭힌다. 루프탑과 테라스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때는 6월, 그것도 하지임을 마음에 아로새길 것.
다섯, 맥주를 마십니다.
자고로 명절이라면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다. 설에는 떡국, 추석엔 송편, 하지엔 맥주다. 하지에 술을 마시는 이유는 앞서 밝힌 것처럼 낮술이 주는 일탈의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소주나 와인이 아니라 맥주인 이유는 맥주의 주원료인 보리의 추수가 하지 즈음에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옛부터 첫 추수한 보리로 술을 빚어 하지에 맥주를 마셔왔다는 것은 거짓말이고 내가 맥주를 좋아해서 그렇다.
여섯, 일탈이 필요한 사람에게 권합니다.
작년에 남산 아래 루프탑이 좋아서 올해 또 가려고 보니 해가 떨어지기 전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이 매우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아직 해가 떠 있을 때 그곳에 도착하려는 나의 마음을 십분 공감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다행히 서울역 근처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몇 있었고 나의 제안에 기꺼이 응해 주었지만 여의치 않은 사람도 분명 많을 것이다. 그럴 때는 일탈이 필요한 친구에게 하지를 권해보자. 왜 하필 하지여야 하냐는 질문이 나온다면 다음 문장을 참고 바란다.
하지를 쇠면 좋은 점
하지는 서양 기념일 발렌타인데이나 상술로 만들어진 빼빼로데이처럼 남들이 다해서 떠밀려 기념하는 날이 아니다. 나의 의지로 쇠기로 하는 순간, 나만의 기념일이 생기는데 그 날의 정통성이 무려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매직을 경험할 수 있다. 게다가 하지를 쇠기 시작하면서 부터 6월만 되면 설렌다. 나와 별 상관없던 호국보훈의 달 6월을 가장 좋아하는 계절로 만든 건 순전히 하지다. 하지 정말 사랑하지!
2018년 6월 21일 목요일
오늘 서울의 해 지는 시간은 7시 50분. 날씨는 맑음, 미세먼지는 보통. 완벽한 하지가 될 예정이다.
#목요일의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