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하는 인천

그리고 호치민

by 손콩콩

책에도 인연이라는 게 있나보다. 호치민으로 출국하기 열흘 즈음 전이었다. 호치민으로 옮겨갈 짐이 이미 너무 많아서 일부러 책쇼핑을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서점에 갔고, 그냥 나가기가 허전해서 <경애의 마음>을 집어 들었다.

‘추석 때 다 읽으면 되지 뭐.’


그리고 추석 때 정말 조금 읽었는데 그 조금 읽은 부분에 ‘인천’이야기가 있었다.


인천, 오 나의 인천!

솔직히 인천을 왜 좋아하냐고 물으신다면 가르쳐 드리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별 이유가 없다. 그건 내게 “엄마가 왜 좋아?” 같은 질문이다. 나는 오래도록 주어진 것들을 사랑해왔다. 인천이 그랬고, 다녔던 학교들과 교회가 그랬으며, 자라서는 마케터라는 직업이, 회사가 있는 동네들이 그랬다. 인천을 사랑해서 사람들이 인천을 모르거나, 평가절하하거나, 인천을 사랑하는 나를 신기해하면 속상했다.

인천의 홍예문. 인천사랑 이야기는 다음에 더 하도록 하자.

책이나 영화에서 인천이 나오면 반가운 건 당연했다. 그랬는데 작가님이 인천에서 자라셨다더니 <경애의 마음>에 인천이 등장했다.


이 책의 큰 줄기를 이루는 이야기는 내가 고1때 실제로 일어난 “인천 호프집 화재” 사건이다. 그 날 TV를 보는데 뉴스 속보가 떴다. 인천의 한 호프집에서 큰 불이 났다는 소식. 우리 학교는 사고가 일어난 곳에서 가까웠고, 단박에 비극을 예감했다.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들리는 말로는 비상연락망이 가동도 되기 전에 모두 학교에 모였다고 했다. 우리학교에 사망자와 부상자는 없었다.


그 때의 생각은 너무도 어려서 잘사는 동네에 있는 공부 잘하는 학교 학생이 죽거나 다쳤다는 이야기가 그저 신기했다. 소득수준이 낮은 동네에 공부는 못하기로 소문난 우리 학교가 이 불행을 피했는데 말하자면 모범생들에게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부끄럽게도 나는 아는 사람 중에 비극을 맞이한 사람이 없다는 것에 안도했고, 사건을 잊었다.


인천을 사랑한다는 내가. 그랬다.


내가 목도한 일을 '다행이야 내 일이 아니어서' 하는 마음이라니. 그래서 나는 소설가가 되지 못했구나. 나는 어딘지 부끄럽기도 하고, 예민하게 그 사건을 꺼내어 놓은 작가가 부럽기도 했다. 나는 겨우 인천이 등장하는 부분까지 읽고, 책을 덮었다. 책은 방 어딘가에 널부러져 있었다. 사실 서점에서 책을 집어들 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지만 조금 찔렸다. 시간이 없다기 보다 의지가 없었던 까닭이었다. 방을 정리하다가 책을 책장에 꽂아 넣기 전 최소한의 예의로 페이지를 후루룩 넘겨 보았다.


호.찌.민.

빠르게 넘어가는 페이지 가운데에 단어 하나가 와서 박혔다.

이 장면은 내가 본 호치민과 아주 닮았다


호치민, 오 이제 호치민!

미싱제조사의 영업직원인 상수와 경애가 호치민에 발령이 난 장면이었다. 호치민으로의 발령이라. 나는 책을 얼른 덮고, 트렁크에 <경애의 마음>을 집어 넣었다. 글쓰기 슬럼프를 선언한 나의 치료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김중혁 작가의 <무엇이든 쓰게 된다>와 e-book 리더기를 챙긴 상태였지만 <경애의 마음>을 넣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인천에 이어 호치민이 나왔는데 주인공들이 많고 많은 도시 중에 “호치민"으로 여행도 아니고 “발령”이 났는데 어떻게 책장에 꽂을 수가 있을까.


호치민에 도착해서 몇 주가 지나 책을 꺼내 읽었다. 내가 보고 겪고 느낀 3주간의 호치민과 책 속의 호치민을 비교하며 읽자니 더 흥미롭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호치민의 한국인 회사원 이야기를 김금희 작가님에게 선점 당한 것 같아 샘도 났다. (나는 샘이 왜 이렇게 많나.)


경애와 상수가 만난 호치민은 내가 만난 호치민과는 같으면서도 다르다. 나는 호치민을 중심으로 일을 하고 있지만 경애와 상수의 무대는 호치민과 그 밖의 베트남이다. 책에서 묘사된 호치민도 조금 다르다. 몇 년 사이 이 역동적인 도시는 영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의 월급을 20만원(소설에서 20만원이다)에서 100만원으로 올려 버렸다. 동남아는 날이 더워 한낮에 움직이는 사람이 적다는데 점심 시간 호치민의 도로는 그야 말로 만원이고, 뭐든 여유로워 성격 급한 한국인들과 마찰이 생기기 십상이라 들었는데 이곳은 정말 빠르다. 얼마나 빠르냐면, 한국인이 느리게 보일 만큼 빠르다. 오늘 인터넷 쇼핑을 하면 내일 받는 정도가 아니라 2시간 뒤에 받고, 오전에 미팅을 하고 싶다고 연락하면 바로 오후에 만나자고 한다.


게다가 경애와 상수의 상황과 내 상황은 다르다. 그들은 쫓겨나듯 왔지만 나는 손을 들고 왔다. 한국인들끼리 사기치고, 등쳐먹는 행태는 (만나서는 안되겠지만) 겪기 전이고 호치민을 조금만 벗어나도 영어가 한 마디도 안 통한다는 세계에 발을 디뎌 보지도 못했다. 타지에서 꽃피는 끈끈한 동지애는 이제 막 시작이고, 우리 사업은 그 둘의 것보다 잘될 것이다.(그럼그럼!) 무엇보다 호치민 속 나의 이야기는 로맨스물이 아니라 오피스물이니까.


이제 한 달하고 고작 며칠, 30년을 넘게 살아온 인천의 이야기도 제대로 풀어놓지 못하는 내가 호치민이라고 잘 하겠느냐마는 그래도 1년, 2년 쯤 시간이 지났을 때 나에게 담아 놓기에는 너무 뜨거운 호치민의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 쓸 수 밖에 없어서 쓴 소설에 호치민이 등장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한 모든 장소들이 나를 작가로 키워주길, 이야기로 그 장소에 보답할 수 있길. 샘은 그만 내고. 이제 진짜 쓰자.




+

인천 다음으로 좋아하는 동네는 단연 홍대다. 홍대는 독립생활의 첫 터전이고, 인천 이후에 가장 길게 머물고 있는 지역이다. 나는 자칭 메트로 홍대 주민인데 역으로는 신촌-홍대-합정/상수-망원/서강대를 커버하고 연희동과 망원동 기분 좋으면 당인리까지 넣는 넓은 지역이다. 작가님 인터뷰에 따르면 경애의 상사이자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 공상수의 이름은 상수동에서 따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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