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왔다
사이공에 온 지 두 달, 모처럼 사막(사실은 모래언덕)을 보러 무이네로 여행을 갔다. 지난 두 달 중 단 하루만 하루 종일 부슬부슬 비가 왔을 뿐 거의 모든 날이 맑았고, 우기라고 해도 오후 한 때 1~2시간 쏟아붓고 개는 날씨라 휴가를 떠나면서도 날씨를 챙겨보지 않았다.
첫날은 좀 흐렸다. 사이공에서 흐린 날이 드물어서 좀 낯설기는 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다음 날 새벽 4시반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사막에 갔다. 날이 잔뜩 흐렸고 간혹 비가 흩날리기도 했다.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갔는데 타고 간 지프에 창이 없어서 닭살이 돋을 만큼 추웠다. 일출을 보려는 많은 날들이 그래왔으므로 그때까지도 그저 머피의 법칙이려니 했지만 사막투어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비가 쏟아졌다. 사이공에서 차로 다섯 시간 즈음 떨어진 곳이니 날씨가 좀 다를 수도 있겠거니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파도가 거셌고, 오후 내내 비바람이 불었다. 날이 갤 기미가 없어 그제야 날씨를 찾아봤다. 태풍이 왔다고 했다.
휴양지로 휴가를 온 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로 갔던 오키나와에서도 태풍을 만났었다. 파도가 덮쳐대는 해안도로를 통과하여 추라우미 수족관에 갔는데 태풍때문에 휴관이었던 소중한 추억... 태풍이 온 무이네는 더 무력했다. 그래도 오키나와는 제법 커서 쇼핑을 한다거나 카페에 간다거나 실내에서 할 일이 좀 있었지만 무이네에서는 방에 갇혀 있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었다.
해산물 식당의 태풍
삼시 세끼를 호텔에서 먹을 수 없어서 비바람을 뚫고 해산물을 파는 식당이 모인 거리로 갔다. 무이네 여행에서 내가 잘한 일은 일몰투어가 아닌 일출투어를 선택했다는 것이고(그래서 모래언덕이나마 볼 수 있었다.) 내가 가장 잘못한 일은 해산물 식당에 간 것이다.
식당은 바다 바로 옆에 자리했는데 파도가 바로 옆에서 식당을 덮칠 듯이 쳐대서 정신이 없었다. 파도소리에 모든 소리가 묻혀 친구랑 대화가 안될 정도 였다.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정말 큰 파도가 바다와 식당을 구분해 놓은 비닐천막으로 뚫고 식당을 덮쳤다.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는데 맞은 편에 앉아있던 친구가 혼비백산 하고 있었다.
“왜? 왜? 휴대폰 젖었어!!!!???”
친구는 대답도 하지 못할 만큼 넋이 나간채로 무언가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바퀴였다.
실제로 식당을 덮친 파도와 친구의 다리를 타고 올라온 바퀴에 판단력이 흐려진 나머지 식당을 떠날 생각을 못했다. 어느새 음식이 나왔고 어디로 들어가는 지도 모른채 다시 등장한 바퀴(자리를 옮긴 우리 발밑으로 한 번, 우리 옆 테이블을 치우던 점원 등에 올라타서 한 번 더 등장했다. 그 점원은 바퀴벌레를 털어내며 웃었다)에 다시 혼을 빼앗겼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램당 값을 치루는 바닷가재 가격을 흥정하는 것도 잊은 채였다. 다만 바닷가재와 매우 닮은 새우가 바다의 바퀴벌레라는 읽어보지도 않은 어떤 기사의 제목이 점점 또렷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결국 음식의 반도 못 먹고 눈탱이 맞은 값을 치루고 호텔로 도망쳤다.
사이공 태풍
다시 사이공으로 돌아가는 날, 오전 날씨는 제법 안정적이었으나 버스에 올라타자 폭우가 시작됐다. 사이공에 도착하면 괜찮겠지 했지만 다섯 시간 뒤 나를 맞이한 것은 발목까지 차오른 물이었다. 사이공의 중심, 1군이 물에 잠겨 있었다. 굵은 빗줄기는 계속 됐고, 빗물과 역류한 하수가 뒤섞인 물을 걸어야 했다. 당연하게도 택시는 잡히지 않았다.
1군이 다른 곳보다 지대가 좀 낮을 수 있겠거니 했다. 웃돈까지 얹어 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잠긴 것은 1군뿐이 아니었다. 가는 길 내내 도로가 침수되어 있었다. 아마도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긴 듯 했다. 도로가 물에 잠기는 일은 여름철 한국에서는 제법 흔하지만 집에 가는 모든 길이 이런 적은 없었다. ‘이 도시 설비가 엉망이네!’ 하다가 혹시 하수가 역류할 만큼 많은 비가 내리는 일이 잘 없나 싶어졌다. 한국의 내진설계 기준이 지진이 잦은 일본보다 낮은 것처럼 태풍이 흔치 않은 일이라면 태풍을 대비한 시설이 없는 게 당연할테니까.
아마도 이날의 비가 특이한 상황 같았지만 그래도 우기에 짧은 시간 집중호우가 쏟아지는 도시의 하수시설이 겨우 이 정도라니 너무 안일하지 않은가. 일년 중 한 번이라도 이 정도의 비가 올 가능성이 있다면 이보다는 철저한 하수시설이 필요했다.
사이공은 건기와 우기로 계절이 나뉘는 곳이다. 처음 만난 우기는 신기했다. 우기가 장마같이 축축하고 끈적끈적한 날씨가 계속 이어지는 줄로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겨울이 우기인 밴쿠버처럼 추적추적 비가 종일 내리는 것도 아니었다. 하루에 한 두시간 시원하게 굵은 비가 내리고 나머지 시간은 뽀송했다. 비가 오는 두 시간을 포함한다해도 서울의 8월보다 훨씬 나은 날씨였다.
‘여기 날씨는 참 예측 가능하니 그것 참 좋군.’ 했었는데 나무가 휘어져라 부는 바람과 그 바람에 실려 날아오는 비에 뺨을 후려 맞자니 이건 다 오해였군 싶었다.
아침이 되니 날이 개어 있었다. 집 앞에 가로수가 쓰러져 있지 않았더라면 간밤의 일이 꿈인 줄 알았을 거다. 나중에 알고 보니 1군에 있던 친구는 1시간 째 택시가 잡히지 않아 결국 호텔에서 잤다고 했다. 현지 직원 하나는 출근길이 침수되어 재택 근무를 해야 했다.
동료들과 간밤의 날씨 이야기를 나눴다. 나와 같이 사이공에 도착했으니 모두들 이런 날씨는 처음이었다. 다들 도로가 물에 잠긴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 도시에서 도로 침수가 웬말이냐며. 동료 하나는 알고보니 이 비는 태풍도 아니고 열대성 저기압이라고 했다. (태풍이 더 심각한 단계다) 태풍이라도 오면 이 도시는 어떻게 되나.
다음 날 건물 관리인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이공에서 이런 비는 몇 년에 한 번 있을까 싶은 일 이라는 걸 알게 됐다. 글을 쓰면서 검색해 보니 이번 열대성 저기압의 이름은 우사기(토끼)이고, 열대성 저기압이 아니라 열대성 폭풍이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열대성 폭풍부터 태풍으로 분류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누군가에게 무이네는 인생 최고의 휴양지일 수 있고 무이네 모래언덕은 뜨거운 사막의 정점이자 인생샷의 무대일 수 있다. 무이네의 해산물 식당은 싸고 신선한 해산물 천국일 수도 있다. 사이공은 변덕없는 날씨의 대명사일 수 있고, 태풍은 국제뉴스에서나 나오는 남의 일일 수 있다.
이곳에 방문한 친구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여기는 베트남에서 가장 부자인 도시야. 베트남의 어디 보다 빠르고 발전된 상태지. 그러니까 사이공에서 겪은 일을 보고 베트남이 모두 이럴 거라고 생각하지마. ‘아 사이공은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좋겠어. 아니 그보다는 ‘오늘 내가 만난 사이공은 이렇구나!’ 하는 게 더 낫겠어.
그리고 사실 그 말은 친구들보다는 내게 하는 말이다. 매일 잊지 않고 다시 해야하는 말이다.
#목요일의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