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여름

시간이 멈추었다

by 손콩콩

바람이 코끝을 맵싸하게 만드는 계절이 오면 ‘아, 올해도 이렇게 끝나 가는구나. 올해 나는 무엇을 했더라.’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다 올해 하고 싶었는데 못했던 일을 갑자기 시작하거나 올해 시작했지만 별 성과가 없었던 일에 불현듯 속도를 붙였다.


그런 일은 최근 몇 년 사이 도드라졌다. 그 결과 한 해에 가장 인상깊은 사건이 11월, 12월에 등장 하는 일이 잦아 졌다. 독립, 첫 자작곡, 첫 책, 퇴사가 지난 2~3년 사이 11월과 12월에 내가 벌인 일이다.


나의 패턴을 일년으로 넓혀 보자면 이렇다. 1, 2월에 새해 기운을 받아 슬슬 계획을 세운다. 3월 즈음 봄바람이 불거든 새학기를 시작하던 관성으로 조금 시도한다. 7월이 되어 상반기를 결산하거든 아직 절반이나 남았어 하고 스스로 위로도 하고 다그쳐도 보면서 재정비 한다. 그리고 찬바람이 불면 그제야 정신이 바짝 들면서 뭐 하나라도 마칠려고 애쓴다. 봄여름가을겨울이 있는 도시에서 ‘나’라는 동물은 계절에 맞게 생각하고 움직이고 살아내었나 보다.


해외발령은 올초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변화였다. 그런 해외발령을 인생에 추가시키는 바람에 많은 것들이 달라질거라 생각했지만 “추위없음”이 내 패턴에 변수가 될 줄은 미쳐 몰랐다.


12월. 이 글을 쓰고 있는 카페에서 온갖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공유 오피스만 해도 진작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뒤덥혔지만 날씨 탓에 아무래도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는다.


연말 분위기가 안나는 정도가 아니다. 실은 끝나지 않는 사이공의 여름처럼 시간이 멈춰있는 기분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이공에서의 내 시간은 하루종일 베트남어를 공부하던 8월에 멈춰있는 것 같다. 밖은 찌는 듯이 덥지만 추울 만큼 시원한 사무실 한 켠에서 미지의 도시를 상상하며 낯설디 낯선 단어를 외우던 바로 그 여름에.


사이공에 도착한지 이제 두 달. 그 사이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되었다. 거의 매일 오후 4시~5시면 쏟아붓던 비가 점점 뜸해지더니 어느새 습한 기운이 사라진 뽀송뽀송한 더위가 찾아왔다. 매일 오던 비가 안 오긴 하지만 사무실에 갇혀 있는 나에게는 가을에서 겨울이 되는 것 만큼의 드라마틱한 변화는 아니었다. 그저 여름. 계속 여름일 뿐.


물론 사이공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뽀송뽀송한 더위가 시작되면 ‘아 올해도 끝나는구나. 올해 나는 무엇을 했더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 한 해를 보내는 마음이 조급해 질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는 여태 여름을 살고 있고 올해를 보낼 준비를 전혀 하지 못했다.


영원히 시간이 멈춰있지는 않을 것이다. 몇 주 뒤면 연말을 보내기 위해 한국으로 간다. 인천공항에서 35도 쯤 낮아진 추운 날씨를 만나면 멈춰있던 시간이 한꺼번에 훅하고 흘러 버릴 것 같다. 하루하루 늙어갔다면 몰랐을 세월을 5개월치 묶어 늙으면 그야말로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느낌이지 않을까. 무엇보다 찬바람을 맞고 정신 차리기에는 한국에서 내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나 짧다. 그렇다면 미뤘던 일을 시작하거나 지지부진하던 일에 속도를 붙이지도 못하겠지.


에휴. 한국에서 정면으로 마주칠 건 세월이 아니라 멈춰있던 ‘나’라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모르는 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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