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전동 아니고
서울 이외의 지역에 사는 사람은 보통 자신이 사는 곳을 부산, 광주, 수원, 충주 처럼 ‘시’단위로 말한다. 반면에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동’이나 ‘역’ 단위로 말한다. 간혹 ‘구’단위로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내가 만난 사람 대개가 그렇다. 내가 나고 자란 인천은 서울보다 면적이 1.7배나 크지만 사는 동네를 구체적으로 말할 기회는 적었다. 우선은 궁금해 하지 않았고, 말하더라도 대부분 몰랐다. 가끔 서울 사람들에 섞여 사는 곳을 이야기하게 될 때면 ‘도곡동’, ‘망원동’, ‘청파동’에 이어 ‘주안동’이라고 대답하는 나를 상상하곤 했다.
그러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 나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사는 곳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늘 다르게 말했다. 어느 날은 뭉뚱그려 홍대였고, 어떤 날은 동교동 삼거리 근처였으며, 센치한 날엔 연남동 앞, 좀 낯설다 싶은 사람에게는 마포구라고 했다. 연희동이라고 할 때가 제일 많았는데 해당 지역이 꽤 넓어서 너무 구체적이지 않고, 궁이름에서 따와 그런지 어감도 고급스러운데다가 중산층의 여유가 묻어나서 그랬다. 사는 곳 도로명이 연희로니까 크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가장 드물게 창천동이라고 대답했다. 상대가 홍대나 신촌을 잘 아는 게 아니면 그 외의 사람에게는 인천 주안동과 다를 것이 없어서...는 거짓말이고 솔직히 이름이 마음에 안 들어서였다. 발음이 어려울 뿐 만 아니라 거센소리가 두 개나 붙어있어 어감이 거칠고 그게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는 창.천.동.
동네이름을 집값이나 통근시간, 면적, 채광과 같은 기준과 나란히 둘 수 없겠지만 만약 고를 수 있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못생긴 이름, 창천동.
그렇다. 사실 나는 창천동에 산다.
창천(滄川)이란 이름은 서대문구 안산(山)에서 시작하여 광흥창을 거쳐 서강(한강의 서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물줄기인 창내에서 유래되었다. 창천은 대부분 복개되어 도로 밑을 흐르고 있다. 창(滄)은 큰 바다라는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천의 이름인만큼 검푸르다나 차다라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창천동은 동교동, 연남동, 연희동, 신촌동 등과 인접해 있어 길 한 번만 건너면 핫한 가게가 지천이다. (물론 그 한 번을 반드시 건너야 한다.) 신촌역과 홍대입구역이 가까워 도보 이동이 가능하다. (가능하다고 모두가 걷는 것은 아니다.)
2년 전, 창천동을 선택한 이유는 회사와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걸어서 15분. 12시까지 야근해도 12시 30분이면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창천동이라서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 위치쯤에 흑석동이 있었다면 흑석동을 택했을 것이고, 공덕동이 있었다면 그 또한 그랬을 것이다. 창천동은 나에게 딱 그 정도였다.
지난 주, 긴 연휴가 끝나고 아직 일상이 익숙해 지기도 전에 불현듯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약만료 기간이 40일 뒤로 다가왔고, 회사가 가까워서 택한 동네에 더 이상 회사가 없었다. 처음 창천동 집을 찾았을 때 처럼 회사를 중심에 두고 반경 2킬로 미터 이내의 집을 알아 보았다. 그리고 며칠동안 열 곳이 넘는 집을 봤다. 그나마 매물이 많은 시즌이라는 데도 눈에 차는 집이 없었다. 집을 보면 볼 수록 내가 지금 얼마나 좋은 집에 살고 있는지 동네는 또 얼마나 좋은지 새삼 깨닫게 됐다. 그리고 내가 지금 사는 집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도 확실해 졌다. 수고해서 고른 집이기도 하거니와 온전한 내 첫 공간이었고,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동네를 코앞에 둔 창천동 집을 누가 쉽게 이기겠는가. 지난 점심시간까지 직방에서 집을 찾아보았지만 그건 '혹시' 보다 '역시'에 힘을 싣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마음은 기울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2년 만에 나는 창천동이 창천동이라서 선택한다. 나는 마포구가 아니라 서대문구에 살고, 연희동도 연남동도 홍대입구는 더더욱 아닌 창천동에 산다. 그리고 당분간도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