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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Sep 28. 2015

달리 말하자면 말야.

줌파 라히리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

이 책을 읽은 것이, 나를 무기력함에서 건져내어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믿어보는 전환점이 되어주기를 소망해보는 밤이다.



잘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어렸을 때 언제인가는 영어를 매우 좋아했던 것 같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우리 엄마는 5학년 때 나를 영어학원에 등록시키셨는데 그 학원에는 6학년부터만 반이 있어서 나는 한 살 많은 언니 오빠들과 공부를 해야 했다.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도 싫지 않았다. 재미있었다.

그리고  수년 뒤, 나는 어떤 계기로 영어를 잃었다. 

가져본 적이 없는데 잃었다고 말하자니 좀 우습기도 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정말로 잃어버렸으니까.

그리고 이십 년이 흐르고 최근에 나는 동경하던 다른 외국어 공부를 시작했다.

이십 년 전 처음 접하고 무한한 사랑을 느꼈던 언어, 그러나 배울 기회가 없었던 언어, 배우고 싶은 마음만 간직했던 언어.

하지만 알파벳을 읽으며 이미 나는 포기하고 있었다. 

처음의 포부와 다짐, 기대와 설렘은 부끄러울 정도의 빠른 속도로 내 삶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미 나는 나이가 많은 것이라고, 역시 새로운 언어를 시작하는 건 가당찮은 일이었다고 후회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리고 몹시. 몹시 읽고 싶어 졌다. 내가 놓친 그녀의 글들을.

 


그러던 중에 줌파 라히리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이탈리아어로 쓰여진 산문집이고, 영미권보다 우리나라에 먼저 나왔다는 놀라운 소식도 들려왔다.

그러니까, 뱅골어가 모국어이지만 영어로 글을 쓰는 미국 작가인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라어로 쓴 산문집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라는 이야기.

단숨에 읽어버렸다.

짧은 책이기도 했고,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고, 게다가 작가가 어른이 되어서 익힌 외국어(이탈리라어)로 쓴 첫 책이니 문장이 조금은 단순한 이유도 있겠다.

줌파 라히리가 이탈리아어를 사랑했다지만 20년 동안이나 사랑했을 것이라고는 생각 못했고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로마로 이주까지 했다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사실 나는 그녀의 소설들을 다 읽다 말았다. 네 권 모두 말이다. 

높은 별점과 그녀를 향한 최고의 찬사들을 접할 때마다 뭔가 잘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는데, 오늘 그녀의 가장 최근의 글을 가장 먼저 끝까지 읽음으로써 그 부담감을 조금 내려놓았다.

그리고 몹시. 몹시 읽고 싶어 졌다. 내가 놓친 그녀의 글들을.




그녀의 이탈리아어 공부는 그 언어 자체를 향한 오래고 깊은 애정에서 비롯되었기에 시작이 다르다 쳐도, 어떻게 어른이 되어서 시작한 외국어로 책을 쓸 수 있단 말인가라는 강한 의문을 가지고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그 의문은 책을 읽으며 금방 해소되었다.

책 전반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도움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조력자들, 그녀의 식을 줄 모르는 이탈리아어를 향한 사랑, 그리고 엄청난 학습량이 이유이겠다.

물론 그녀가 언어를 가지고 놀며 언어를 사용해 이야기를 만드는, 아마도 현재 젊은 작가들 중 가장 사랑받는 작가라는 것은 많은 같은 출발선에 있는 사람들을 좌절시키는 요소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대단한 언어의 마술사인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단어가 백개씩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을 리 만무하니 역시 노력이 외국어로 글을 쓰기 위한 도약의 가장 크고 단단한 발판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옮긴이 또한 '옮긴이의 말'을 통해 나는 언제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적 있었던가 자문하며 부끄러웠다고 적었을 만큼, 짧은 글 곳곳에 이탈리아어와 한 몸이 되기 위한 노력이 묻어있다.


나는 어떤가. 새로이 시작한 언어 앞에 서서 나는 지난 20년 동안 그 언어를 사랑해왔노라고, 배울 날만을 기다려왔다고 마치 지나간 짝사랑을 고백하듯 수줍게 말하면서 정작 노력은 하지 않았다.

정말 기회가 없었을까 돌아보니 기회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용기가 없었다.

공부했지만 말 한마디 못할 것에 미리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마주할 상실감과 당혹감이  부끄러워, 해보지도 않고 차단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은 것이, 나를 무기력함에서 건져내어 다시 한 번 나 자신을 믿어보는 전환점이 되어주기를 소망해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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