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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Sep 29. 2015

열일곱번의 불면의 밤.

하루키의 <잠>

매일이 안 될 수도 있지만, 매일 무언가를 적고 기뻐하던 그때의 마음으로.


아이들 등교를 위해 아파트를 나서는데 창문 밖으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나뭇잎들이 보인다.

자동으로 켜진 에어컨을 얼른 끄고 창문을 내리니 아, 이 공기. 이 냄새. 가을 냄새다.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 핸드폰으로 마구 찍어도 아름다운 컷이 나오는 반가운 가을 하늘이다.

나는 오늘 혼자놀기를 하기로 한다.

차가 멈췄을 때는 다소 민망할 정도의 큰 볼륨으로 에피톤 프로젝트의 음악을 틀고 교보문고로 달린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큰 서저이다. 출발전에 바로드림 서비스로 신청해놓은 책 한 권을 받아 들고 샐러드 한 팩을 구입,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리고는 (건강해지는 기분을 느끼며 ) 야채와 닭가슴살이 섞인 샐러드를 깨끗하게 비우고, 빵 두 쪽은 잠시 고민하다 남기고,  책 한 권을 다 읽고 아이들 학교로 돌아왔다.







나는 원래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도 아니고 어쩐지 몇 년 전부터는 좋아하던 그의 산문도 시들해진 참이었는데 어디선가 이 책의 첫 문장을 본 순간 이 책은 꼭 봐야 하며, 아마도 굉장히 재미있을 것이고, 엄청나게 인상적일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잠을 못 잔 지 십칠 일째다.


그리고 뒤따르는 문장은 , 불면증 얘기를 하는 게  아니다.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지금 잠을  십칠일 째 못 자는 것과는 다른, 보편적인 불면증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진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졸음 비슷한 것이 찾아온다. 나는 잠의 테두리쯤을 손끝에 아주 조금 느낀다. 하지만 얇은 벽으로 나누어진 바로 옆방에서 내 의식은 생생하게 깨어 나를 지긋이 지켜본다. 
내 육체는 흐느적흐느적 옅은 어둠 속을 헤매며 계속 나 자신의 의식의 시선과 숨결을 바로 옆에서 감지한다. 나는 자려고 하는 육체이고 동시에 깨어나려고 하는 의식이었다.

p9



어쨌든 이 이야기 속 주인공-이제 막 서른이 되려는 참이고 남편과 아들이 있는-이 겪는 것은 이러한 불면증이 아니라, 어느 날 갑자기 가위에 눌린 후 아예 잠을 안 자게 (못 자게) 된 것인데 그 기간이  십칠일에 이른 그 밤에 이야기는 끝이 나게 된다.

하루키는 불면증을 겪어본 사람임에 틀림없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십 수년 전 자고 싶어도 잠을 잘 수가 없어 괴롭던 시절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와 나의 차이라면 그는 그 상태를 저렇게 정확하게 언어로 풀어냈다는 것이리라. 

뭐, 내게 그런 능력(+노력)이 있었다면 나도 진작에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내 생활이다. 즉 잠을 못 자게 되기 전까지의 내 생활이다. 하루하루가 거의 똑같은 일의 되풀이였다. 나는 간단하게 일기 같은 것을 쓰고 있지만  이삼일 깜빡 잊고 쓰지 않으면 어느 날이 어느 날인지 벌써 구별하지 못한다. 어제와 그제가 뒤바뀌어도 거기에는 아무 지장도 없다. 이게 대체 무슨 인생인가. 때때로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허망함을 느낀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냥 단순히 깜짝 놀랄 뿐이다. 어제와 그제의 구별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런 인생에 나 자신이 끼워 맞춰져 버렸다는 사실에. 나 자신이 찍은 발자취가 그것을 인정할 틈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바람에 날려가 버린다는 사실에. 그런 때, 나는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다. 십오  분쯤 머릿속을 텅 비우고 나 자신의 얼굴을 순수한 물페로서 관찰한다. 그러면 내 얼굴은 점점 나 자신에게서 분리되어간다. 그리고 어쩌다가 우연히 한자리에 동시에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렇다, 이것이 진짜  현실이야,라고 나는 인식하다. 발자취 따위, 아무려나 상관없어. 이 동시 존재를 지금 그대로 유지해가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내게 요구되는 일이다.

p26



불면증이야 그가 얼마든지 겪었을 수 있는 일이라 쳐도, 그가 하루하루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 같은, 남편과 아이를 보살피며 자기 자신은 잃어가는 주부가 되어보았을 리가 만무하건만 어찌 이런 묘사가 가능한 건지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하루키를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주인공이 서른을 앞두고 있는, 그러니 아직 삼십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라는 것이 결혼과 출산이 점점 늦어지는 요즘 기준으로 보면 조금 어색하게 다가오지만, 이 소설이 26년 전의 글임을 감안하면 그 또한 이상할 것이 없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안나 카레니나》를 계속 읽기 시작했다. 다시 읽으면서 새삼 알게 된 것이지만 나는 《안나 카레니나》의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등장인물도 장면도 대부분 잊어버렸다. 전혀 다른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참 신기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처음 읽었을 때 나름대로 감동도 했을 텐데 결국 아무것도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당시에 품었을 감정의 떨림이나 흥분의 기억은 어느새 나를 떠나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면 그 시절에 내가 책을 읽기 위해 소비했던 그 엄청난 시간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책 읽기를 멈추고 한참 동안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뭐가 뭔지 잘 알 수 없었고, 그러다 보니 내가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p49




하루키 말고, 남성 작가인데 여성 입장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소설을 쓴 다른 사람이 있던가? 아마도 있을 테지만 내가 읽어본 적이 없기에 이 소설이 더욱 놀랍게 다가온다.

읽는 동안은 소설 속  "나"를 만들어낸 인물은 분명 여자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니 말이다.





다시 시트에 몸을 기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울었다. 나는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줄줄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 혼자서 이 조그만 상자 안에 갇힌 채 어디로도 가지 못한다. 지금은 밤의 가장 깊은 시간이고 남자들은 계속 내 차를 흔들어댄다. 그들은 내 차를 뒤엎으려는 것이다.

p94



이 소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열린 결말이지만, 행복이나 안도와는 사뭇 거리가 있는 느낌으로 마무리된다.

물론 이것은 추상적인 표현일 것이고, 이 상황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일 것이다.



아, 너무나 좋았다. 

아름답고 맑은 가을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시종일관 가라앉고 조금은 우울한 글이었지만, 최고였다.





+


뭔지 모르게 무기력하고 힘 빠지는 날들이었다.

그것이 삶 때문인지, 많은 고민들 때문인지, 지나고 나면 선명해질 테지만 지금은 잘 모르겠다.

샘솟던 아이디어들은 머리에서 튀어나와 입을 통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실행하지 못하면 폐기 처분될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지난 글들을 본다.

매일 책을 읽고 이야기를 적을 때가 재미있고 기운 났던 것 같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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