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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Apr 18. 2016

끝나지 않을 고민.

엄기호. 이계삼 외 <교육 불가능의시대>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던 봄날이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이 계절 즈음의 어느 날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가장 친했던 친구와 함께 집에 가려고 마을버스 정류장에 서 있었는데, 우리에게 같은 학교 교복을 입은 두 명이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은 새 학기임에도 학교에서 유명한 아이였다. 모두 귀 밑 3cm의 검은 단발머리를 하고 있는데 홀로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는. 갈색 머리는 갈색 눈동자처럼 타고난 것이라 하고, 긴 머리는 무용을 전공하기 있기 때문에 학교에서 양해해 준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외모와는 별개로 그 아이가 이 일대 중학교 여자 깡패들 중에 탑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으며 그 소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 아이와 뒤따르는 무리들 (날라리라고 불렸던. 표준어인지는 모르겠다) 이 복도를 지날 때면 학생들은 홍해 바다 갈라지듯 양쪽으로 비켜 서곤 했었다.
사실 그 아이는 5학년 때 한 학기 같은 반을 했었다. 내가 살던 동네는 인구 과밀로 몸살을 앓다가 초등학교 하나를 더 지으며 주소지에 따라 인근 학교 몇 개에서 아이들을 분리해 새 학교로 옮겼는데, 그때가 5학년 2학기였다. 바로 그때 잠시 같은 반이었던 그 아이.
하지만 중학교에서 다시 본 그 아이는 5학년 때 그 아이가 아니었다. 그때는 우리와 다름없는 평범한 5학년이었는데 지금은 갈색 머리를 휘날리는 유명한 날라리. 복도에서 몇 번 마주쳤을 때는 알아보지도 못하다가 나중에 이름을 듣고야 알았다. 특이했던 이름이었기에.
그 아이가 내게 다가온다. 이 정류장에는 나와 내 친구, 그 아이와 따르는 아이 하나. 우리뿐이다. 눈도 못 마주치고 친구와 이야기하며 버스가 빨리 오기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다가온 그 아이는 내게 웃으며 슬며시 웃으며 안녕? 인사를 건넸고 자기를 모르냐며, 내가 언제 먼저 인사를 하나 벼르고 있었다고, 오늘은 그냥 넘길 수가 없으니 얘기 좀 하자며 내 팔을 정말 아프게 잡아 쥐고 정류장 바로 옆 건물 1층에, 개방되어 있으나 어두운 주차장 구석으로 끌고 들어갔다.
나는 그 팔을 뿌리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긴 머리를 잡아 쥐고 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순간 내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은 오로지 그 아이에 대해 들은 수많은 소문들뿐이었다.
걔가 껌에 면도칼 넣어서 씹다 뱉었대.
껌에 면도칼.
면도칼..

나는 정말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다.
네가 정말 외모가 많이 바뀌어서 못 알아봤다고.
속으로는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아니 왜 이 일대 깡패들을 다 평정했다는 대 깡패께서 5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수많은 아이 중 나와의 작은 마찰을 기억하시느냐 말이다. 게다가 나는 기억도 안 나는 일을.
무슨 이야기인고 하니 5학년 때 자기랑 누구랑 싸웠단다. 그런데 내가 끼어들어서 기분이 아주 나빴다는 것이다.
아, 그제야 기억이 났다. 여자아이 둘이서 싸웠고, 그중 하나가 그러니까 내 앞에 서서 금방이라도 나를 한 대 칠 것처럼 노려보고 있는 이 깡패 언니가 다른 친구의 가족을 욕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러지 말라고 했던 기억.
나는 너무 무서웠고, 맞기 싫었다. 그래서 위에 적은 것처럼 일단 못 알아본 것에 대해서는 사과를 했다. 세상에, 1년 사이에 사람의 키가 그렇게 커질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170이라는 소문이 있었는데, 아마 맞는 것 같았다. 5학년 땐 나보다 한참 작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리고 끼어든 거는, 그래. 기분이 나빴을 것 같다. 그런데 끼어들었다고 말하긴 뭐하지 않나? 그 아이가 가족을 욕하는 바람에 다른 친구는 울기 시작했는데.
하지만 그 말은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무서웠다.
그런데 혼자 지난날을 말하다 보니 화가 더 나는지, 넌 오늘 내가 제대로 사과하게 해주겠어! 하며 손을 치켜들었고 아, 이제 맞는구나. 하는 순간 아까 생각만 하던 그 갈색 머리칼을 누군가가 확 잡아챘다.



엄마. 엄마가 나타났다.



아무리 유명한 여깡패라해도 14살.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줌마의 손길에 머리채를 잡힌 아이는 맥을 못 추고 길가에 정차된 차까지 종종걸음으로 끌려가 뒷좌석에 태워졌다. 난감한 건 엄마가 그 옆에 나를 태웠다는 건데.. 타서 보니 앞자리에 친구가 퉁퉁 부은 눈으로 타고 있었다. 나중에 들어보니 엄마는 그때 무슨 정신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셨다고 한다.
내가 주차장으로 끌려가는 순간 친구는 공중전화로 뛰어가 집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했고, 엄마는 그야말로 "총알처럼" 출동하신 거다.
엄마는 차를 학교로 몰고 갔고, 그렇게 우리는 선도부로 들어갔고, 선도부장 선생님은 또 우리 교회 친한 장로님이셨다는 이야기..
정학 처리한다는 걸 엄마가 막으셨고, 그 아이가 내게 미안하다고 했고, 나는 선도부장 선생님의 손녀라는 헛소문이 학교에 퍼졌던 중학교 1학년 시절이었다.
좀 우습기도 하고 어처구니없는 학창시절의 에피소드이지만, 그 일을 떠올릴 때면 생각한다.
왜 그런 아이들이 생겨나는가.
그 아이는 이듬해 학교를 자주 결석하고 집으로 찾아간 선생님께 부적절한 모습을 보인 이유로 결국 자퇴 수순을 밟았다.
말이 자퇴지, 자발적으로 학교를 나가지 않으면 퇴학이라는 학교의 요구에 자퇴를 택했다고.
그 후로도 동네와 학교에 흉흉한 소문은 떠돌았다.
건물 지하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는데 그 건물 지하에는 술집밖에 없다. 돈 주면 들어갈 수 있는 학교에 갔다더라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돌았다.
어느덧 이십 년이 훌쩍 지났다. 그 예전에도, 그보다 더 예전에도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은 많이 있었다.
그 안 좋은 기억 때문인지 그런 불량한 아이들을 '나와는 다른 존재'로 규범하여 가까이 하기조차 싫어하던 학창시절을 지나,
학교에서 포기한 아이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학교의 역할은 어디까지일까에 대해 생각해 본 엄마이기 이전의 세월을 지나,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된 지금은 내 안에 두 가지의 생각이 공존함을 느낀다.
학교는 어떤 아이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학교가 포기할 정도의 불량한 학생이 있는 학교에 내 아이는 보내고 싶지 않다는 생각. 이 두 가지의 생각.
부끄럽지만 말이다.


엄기호. 이계삼 외 <교육 불가능의시대>



인문계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대체로 이렇게 극심한 육체적 피로에 노출되어 있다.
왜 이렇게 많이들 자는지,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전국민적인 척추 측만증이 만연해 있지나 않을지 걱정스러울 정도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건 못하는 아이건, 그들에게는 밤새 잠을 자지 않고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는 아이들의 부족한 잠을 달아나게 할 수 있을 교육적 기술을 개발하는 일에 턱없이 실패하고 있다.
아니, 아이들의 부족한 밤잠은 학교가 갈수록 무의미한 공간으로 전락해 가는 것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다.
아이들은 학교에 빼앗긴 하루 일과 이후로부터 자신에게 실제로 중요한 뭔 (그것이 학원 수강이건 과외건 알바건 예체능 교습이건 컴퓨터 게임이건) 하다 보니, 밤잠이 그렇게들 부족한 것이다.
내가 체감하고 있는 바, 오늘날 대한민국의 인문계 고등학교는 사실상, 여관이다.

(중략)

중요한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사유이다.
어설픈 희망의 언사 개선의 노력들, 그래도 학교가 희망이다는 식의 언술은 그것의 현실적인 의미와 도덕적 가치를 떠나 이 교육 불가능을 치유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시키는 것에 기여할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말했듯이 문제를 일으킨 그 마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전혀 새로운 시선으로, 학교라는 공간을 재개념화해야 한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학교란 무엇인가, 아이들을 왜 학교에 보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 새롭게 던져져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학교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아마도 오늘날 아이들은 학교를 어른들이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만든 공간으로 정리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성찰이 밥 먹여주느냐고 하나 마나 한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이 성찰은 학교의 존재 의미 자체를 묻지 않을 수 없는 현실에서 천금처럼 소중하다.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이계삼 (전 중등교사/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수월성이 가진 교육적 함의를 긍정적으로 치더라도 수월성의 논리가 지배하는 학교는 모두에게 좋은 학교는 되지 못했다.
경쟁이 곧 교육인 상황에서 경쟁에서 낙오된 학생은 부진의 덫에 빠지게 되고 이긴 사람은 낙오된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가지기 어렵게 되었다. 경쟁에서 이긴 것은 자신의 노력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고 경쟁에서 진 것은 노력이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수월성이 지배하는 학교는 능력 있는 소수의 개인을 길러 내는 데는 유용하나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에는 치명적이다.
통합교육의 원리가 수월성 교육의 원리로 대체되면서 학생들이 공동체 안에서 느끼는 인격적 자존감과 학습을 위한 흥미와 동기,
앞서는 학생과 뒤지는 학생 간의 인격적 교류가 교수-학습의 효율성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교육학적 관점은 훼손되었다.
이렇게 교육에서 수월성 원리가 지배적 담론이 되면서 학교는 교사나 학생 모두 나와 '너' 만 존재하고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 되었으며 서로 다른 능력을 가진 학생들이 함께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환경 구성을 비효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되었다.

달리는 신자유주의 열차에 '우리'라는 좌석은 없다-정용주(서울 염경초 교사/오늘의교육 편집위원)



우리도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 희망은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데서, 현실의 교육 불가능성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하는데서,
그리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책을 펴내며 가운데.





1990년 전교조 결성으로 해직된 교사 몇이 퇴직금으로 창간한 교육전문잡지 <우리 교육>이 20여 년을 거치며 교사운동의 침체와 함께 혁신에 실패하고 재정난을 겪으면서 구조조정, 편집부 기자 전원 사퇴 등의 일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사태 수습을 위해 모인 독자, 필자, 편집자 등이 <교육 공동체 벗>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드는 데 뜻을 모았고 <오늘의 교육>을 발간하였다. 이 책은 <오늘의 교육> 창간호부터 세 번에 걸쳐 '2011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라는 주제로 한국 교육의 불가능에 대해 이야기했던 부분을 엮은 것이다.
한국 교육의 낡은 체제와 교육 현실을 고발하고 지적하는 글로 무슨 희망을 볼 수 있을까 싶지만,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늘 현실 인식에서 시작된다.

계속해서 교육에 대해 적은 책을 읽고 있다.
아이를 키우며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었지만, 그 어느 순간도 나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유치원과 학교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타협하면 너무나 쉬운 단계이지만 타협이 안 되는 부분들이 많았다.
우리는 이 시대가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오래지 않아 아이를 어떤 기준을 우선으로 키울 것인지에 대해 수년에 걸쳐 나눈 많은 대화를 토대로 아이를 대학에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니,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한국의 대학이라 하겠다.
왜 우리 부부가 우리나라의 대학에 아이를 보내지 않기로 결정했는지에 대해서는 언젠가 더 깊게 풀어놓을 날이 오리라 생각한다.
다만 확실한 건, 한국 대학을 보내지 않겠다고 결정하는 순간, 굉장히 많은 것들이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더 놀 수 있고, 더 생각할 수 있고, 더 심심해할 수 있고, 더 여행할 수 있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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