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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림 Sep 06. 2017

원래 그런 애.

나를 규정짓는 말 중, 가장 서글펐던.

십수   처음 뵙던 , 그의 아버지는 내게 "그래, 요즘 읽고 있는 책은 뭐니." 라고 물으셨고 나는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당시에 읽고 있던 책의 제목과 내용을 말씀드렸다. 후에 남편에게 지금 읽는 책을 묻는 말에 바로 대답을 하는 모습이 좋았더라 하셨다고 한다.  역시 지금 읽고 있는 책을 물으시는 분이 예비 시아버지라는 것이 참으로 좋았다. 요즘 무슨 책을 읽는지 묻는 분과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관계가 규정하는 통속적인 대화 대신 마음을 여는 대화가 오갈  있으리란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결혼  아버님과의 관계는 내가 생각한 것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매일 장사를 하시느라 바쁘신 어머님 대신 아버님께 안부 전화를 드려야 했는데  전화통화가 내게는 참으로  고역이었다. 안부 전화라는 명목 하에 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했다. 엄마,친구와도 통화보다는 문자를 선호하는 인간인 내게 안부전화는 스트레스  자체였다.  이삼일에   하던 안부 전화가 일주일에  , 열흘에  번으로 뜸해지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싫은 소리도 들어야 했다. 매일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던 시부에게 나는 개인 습성을 방패로 내세워 며느리의 도리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의 무게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있지 않은가. 근무 특성상 명절에 쉬지 않는 남편 없이도 아이들을 데리고  명절을 쇠러  수는 있어도,  집에서 홀로 모두가 먹은 설거지는   있어도, 무릎 수술  병원으로 매일 음식은 나를  있어도,  모든 일을 묵묵히 해낼 수는 있어도 전화통화는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여전히. 그리고 세월이 흘러갈수록 더욱더.


어쩌다 보니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후 두어 번의 전화통화만 이루어지고 찾아뵙지도 못한 채 꽤 긴 여행을 떠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긴 여행을 간다고 전화를 해야지 생각한 순간 하기 싫은 숙제가 되어버려 미루고 미루다 떠나는 길에 공항에서 아버님께 전화를 드렸다.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출국장에서야 이루어진 셈이다.

아이들 데리고 언니네 다녀오려고 한다고, 좀 길게 다녀오겠노라고, 좋은 가격의 티켓이 나와 구매했는데 미처 미리 연락 못 드렸다고, 긴장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평소 나의 목소리보다 한 톤 올려 말씀드리니 수화기 너머로 "그래, 넌 원래 그런 애잖아." 라는 말이 들려온다. 기운을 쭉 빠지게 하는 말이다. 원래 그런 애. 원래 그런 애의 의미는 무엇일까.


원래 시아버지께 안부 전화를 잘 안 하는 애. 원래 시아버지의 문자에 하루 지나서야 답을 하는 애. 원래 시아버지가 웃자고 한 이야기에 얼굴색이 변하는 그런 애. 나는 그런 애였던 것이다.


나는 어쩌다 원래 그런 애가 되었을까. 감당하지 못할 일을 계속 웃으며 했어야 옳았던 것일까.

번번히 말로 상처를 받는 위치에 놓인다.  수많은, 검열하지 않고 내게 꽂힌 말들은 며느리를 향한 애정의 표현이셨을까. 그런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따져묻는다면 아마도 그렇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매번 그 말 뒤에 숨은 애정을 읽어내지 못하겠다. 그저 그런일이 한번씩 쌓일 때마다 마음의 문을 조금씩 더 닫아갈 뿐.

원래 그런 애가 되어버린 나는, 채팅 앱을 사용하지 않으시는 아버님의 상황을 핑계로, 긴 여행 동안 연락 같은 건 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어 버린다. 원래 그런 애는 단단히 꼬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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