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대해 글 쓰고 싶지 않습니다.
“모든 건 저희와 상의하고 나서 시작하셔야 합니다.”
시작이라니.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핸드폰을 고쳐 잡고 재차 물었다. 그럼 초안은요? 상냥하고 담백한 답변이 돌아왔다.
“초안부터요. 최종 완성까지.”
작년의 나라면 콧방귀를 뀌며 전화를 끊었겠지만, 올해는 아니다. 이 바닥 일하는 방식이 워낙 다양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올해 초부터 인세에 심심찮게 타격이 오기 시작한 이후로는 나도 내 방식만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라지 않았던가. 남들 손을 최대한 적게 타며 내 것을 만들어내고, 내 것을 좋아해주는 남을 만나면 된다는 건 이제 옛말이다. 남이 내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들이 내 것을 좋아할 때까지 뜯어 고쳐야 살아남을 수 있다. 남들 입맛을 찰떡같이 알아맞히는 것이 요즘 최고의 능력이다.
전화가 끊어진지 오래 지나지 않아 메일로 자세한 가이드라인이 왔다. 작가님의 글이 마음에 들어 조심스럽게 연락했는데, 이렇게도 흔쾌히 협업 프로젝트에 응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빠지면 서러울 오프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내 목소리가 전혀 흔쾌하지 않았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오히려 당혹감을 숨기지 못해 말을 절면 절었지. 전화할 때부터 느꼈지만 담당자 R에게는 칼같은 프로페셔널함이 있는 게 틀림없다. 이 출판사에서 그는 얼마나 일했을까? 거의 매 시간을 혼자 일하는 나로서는 R이 가진 비즈니스적 자아가 탄생하기까지 얼마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들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없다.
유선상 말씀드렸다시피, 이번 프로젝트는 사랑이라는 광범위한 주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간의 사랑, 친구와의 사랑, 연인과의 사랑,…. 일정 및 장소는 하기 참고해주세요.
1. 차주 월요일까지 / 세부 주제 및 테마 선정하시어 본 메일로 회신 부탁 드립니다
2. 차주 수요일 오후 2시 / 브레인스토밍 Coffee Chat
(저희 출판사 건물 1층 카페에서 진행될 예정입니다. )
더하여, 사전에 건물 방문자 등록이 필요하오니, 작가님 실명과 연락처 회신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이런 공동 작업도 한번쯤은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응한 제안인데, 그동안 군데군데 적었던 글들을 모두 모아보니 사랑은 눈꼽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내 눈에는 사랑이 제일 고리타분하고 재미없는 소재다. 쓸 게 없을 때 어거지로 끌고 와 쥐어짜는 눅눅한 행주 같은 느낌이다. 아무리 비틀어도 미지근한 물 세 방울 똑똑똑 떨어지는 게 전부인 대상. 아, 그렇다고 사랑이 가진 힘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축축한 행주로 식탁에 떨어진 국물을 말끔히 닦아 낼 수 있는 것을 보라. 사랑도 쓸모가 있다. 그저 나에게 쓸모가 없을 뿐. 어디에나 존재하고 어디에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굳이 사유할 필요가 없었다는 소리다.
나는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수첩을 지니고 다니며 의식적으로 내 눈에 사랑이 보일 때마다 메모를 했다.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정문에서 아이를 기다리는 엄마, 어버이날 카네이션 꽃바구니를 입에 물고 자전거 페달을 밟는 남자애, 들고 있던 짐을 모두 내팽개치고 우는 딸을 번쩍 안아드는 아빠. 아무렴 가족 간의 사랑이 제일 순수하고 고귀하지. 풋내기 사랑과는 비교할 수도 없고. 나는 서로에게 꼭 붙어 횡단보도를 건너는 젊은 남녀를 바라봤다.
내가 사랑을 싫어하는 이유.
나는 저런 사랑이 싫어서 사랑에 대해 글 쓰지 않는다.
그날 저녁 나는 옷장 깊숙이에 넣어뒀던 신발 박스를 꺼냈다. 감상에 젖기 위함도,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그를 원망하기 위함도 아니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은 날 중에 하나였다. 박스 위 뽀얗게 끼얹어진 먼지가 브랜드 로고를 흐리게 했다.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어서 옆에 그대로 내려둔 나는, 그 안에 들어있던 사진들과 편지 뭉치를 집어들었다. 핸드폰은 바꾸면 끝이라는 둥, 클라우드도 굳이 들어가서 볼 일 없다는 둥, 가지각색의 이유를 대며 꼭 사진을 인화해서 선물했던 사람의 흔적이었다. 맨 앞장에 있는 사진 속에서 아까 전에 본 젊은 남녀와 비슷한 나이대의 내가 웃고 있다. 지금은 거추장스러워 생각도 않는 긴 머리를 하고 있다.
시간은 9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해야 한다. 3일 째 읽고 있는 베스트셀러를 오늘 마무리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온 마음을 다해 나를 사랑해야해서 남을 사랑할 수 없다. 마음 한 켠을 누군가에게 내어준다는 것은 곧 나 자신에게 쏟아야하는 사랑을 뚝 쪼개어 그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럴 수는 없지. 나에게 줄 사랑도 아직 부족한데 그것도 모자라서 남의 몫을 챙겨줘야 한다니. 그럴 바에는 아예 남을 사랑하기를 포기하는 것이 낫다. 나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서서 양치질을 하며 희끗거리기 시작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염색약이 남았던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의 양 끝에는 사랑으로 모든 게 될 줄 알았던 두 사람이 있다. 보통은 그렇다. 분명 연결되어있는데 사실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사랑스러운 만큼이나 외로운 인연은 아무 것도 아닌 말들이 아무 것이 될 때 끝이 난다.
독서를 내일로 미루고 나는 노트북을 다시 켰다. 밤 작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자고 일어나면 까먹을 생각들은 미리 정리해두는 편이 낫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 남을 사랑하지 않는 삶’에 대해 쓰겠습니다.
봄 같은 사랑 글은 아닐 것 같은데, 이 부분 괜찮으실까요?
부연설명을 몇 줄 더 달고 나서 검토를 끝냈다. 그리고 평소처럼 명쾌하게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가- 아차, 임시저장함에 보관했다가 내일 오전에 보낸다는 것을. 나는 시계를 올려다봤다. 밤 10시가 다 되어가고 있으니 R이 바로 회신을 줄리는 만무하지만 이메일 수신 알림 자체가 개인 시간을 방해한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됐다. 평소보다 피곤한 날이다. 피곤하면 실수할 수도 있지. 나는 노트북을 덮고 가습기에 물을 채워넣었다. 근래 옷을 얇게 입었더니 감기 초입인 듯 했다.
*
RE: RE: 2025 공동작업 프로젝트
노트북을 열고 나서 새로고침을 누르자마자 최상단에 새로운 메일이 하나 업데이트 되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나는 메일을 클릭했다.
8시 00분 01초 수신.
부주의했던 나와 달리 역시나 프로페셔널하게 임시보관함에 저장해두었다가 8시 땡 하고 바로 보냈거나, 아니면 예약 발송을 했거나. 어찌됐든 저 메일 발송 시간은 R이 내 메일을 한참 전에 읽었고 답장을 미리 준비해두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괜찮습니다. 모든 사랑이 봄 같을 수는 없지요.
그런데 보내주신 소재 관련해서 궁금한 사항이 몇 가지 있습니다.
혹시 오늘 오전 11시 쯤 잠시 시간되실까요?
나는 따뜻한 생강차로 칼칼한 목을 축이는 중이었다. 전화 말고 팀즈 채팅은 어떻냐고 답장을 보내자마자 그것도 좋다는 R의 회신이 왔다. 오늘 오전은 틀림없이 그에게 여유로운 시간일 것이다. 나는 노트북에 충전기를 꽂고 나서 목캔디를 입에 물고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몸상태가 영 아니었다. 10시 50분에 알람을 맞춰두고 이불로 몸을 돌돌 싸맨 채 눈을 감았다. 한번 잠에서 깨고 나면 다시 잠에 들지 못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눈을 감고 쉴 줄은 알아서 다행이었다.
‘얼마나 더 있다 갈 거야?’
기억하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구름처럼 떠오른다. 이불자락을 꾹 말아쥔 손에 식은땀이 났다.
*
몸이 무겁다고 해서 손가락까지 무거운 건 아니라 다행이다. 그랬었다가는 R의 질문량을 감당하지 못할 뻔했다. 내가 메일로 보낸 설명이 부족했던 건지 그는 여러가지 꼬리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사랑에 대한 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 그럼 부모님은요?
- 가족은 별개죠. 가족을 향한 사랑은 무조건적이잖아요. 사랑의 총량에 포함되지 않아요.
- 사랑의 총량? 그런 게 다 있나요.
그런 게 다 있냐니. 당연한 말을. 나는 설명할 것이 참 많겠다고 생각하며 반쯤 식은 차로 목을 축였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타자를 쳐내려갔다.
- 그럼요. 예컨대 제가 가진 사랑이 100이라고 해볼게요. 그 중 70은 나를 향한 사랑, 나머지 30은 친구들에게 주는 사랑. 뭐 이런 식인 거예요.
- 잠깐만요. 어려운 얘기를 너무 간단하게 하시는 것 같은데...
- 어느 부분이 어려우신가요?
나는 답답한 마음에 내 멋대로 설명을 쓰다가 모두 지웠다. 왜냐하면 R의 말풍선 위로 점 세 개가 뜨더니 한참을 깜빡였기 때문이다.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고 있을까, 아니면 많은 내용을 적는 중일까. R이 답지 않게 오랜 시간을 쓰는 동안, 나는 커피포트에 물을 새로 채운 후 스위치를 눌러두고 왔다.
- 사랑의 총량은 누가 정하나요?
들인 시간에 비해 간단한 질문이었다.
- 그건 사랑의 주체가 정하죠.
- 주체 마음이 바뀌면 총량도 바뀐다는 말인가요?
- 그럴 수도 있고요. 회사 일이 덜 바쁘면 사랑에 쏟을 시간이나 에너지가 더 생길 수 있으니까 100 말고 150이나 200이 될 수도.
- 정말...
R이 다시 답장에 시간을 오래 쓴다. 별로 어려운 이야기가 아닌데. 나는 그간 R과 대화할 때 한번도 갑갑함을 느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당연하고 단순한 주제를 두고 의구심을 갖는 R의 모습에 조금은 놀랐다. 그때 깜빡이던 점 세 개 위로 간결한 답장이 떠올랐다.
- 말도 안 되는 논리네요. 하지만 흥미롭습니다.
뭐라고?
- 세상에서 ‘사랑’이 가장 추상적이고 주관적인 것 아닌가요? 거기다 ‘양’이라는 객관적 개념을 가져다 붙이니 당연히 말이 안 되죠.
- 우리는 생각을 셀 수 없지만, ‘생각이 많아’ 하잖아요. 그런 것과 같은 논리예요.
- ‘사랑이 많아’ 하는 건 그럴싸하게 들리지만 ‘너에게 줄 수 있는 내 사랑은 30뿐이야’는 너무 부자연스럽게 들립니다.
뭐가 부자연스럽다는거야. 그렇게 말하자면 말할 수 있다는 것을 R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커피포트를 가져와 식은 찻잔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 R의 말풍선이 다시 점 세 개를 띄웠다. 내가 오히려 그렇게 숫자로 보여주는 것이 훨씬 정확하고 깔끔한 척도가 아니냐며 타이핑하던 중, R의 답장이 왔다.
- 사랑은 저울로 잴 수 없습니다.
- 알아요. 잴 수 없는 거. 말이 그렇다는 거죠, R씨도 알잖아요, 내가 이 사람을 더 사랑하고 저 사람은 덜 사랑하고... 일종의 비율이랄까.
- 선호도는 있을지 몰라도, 일부러 내 마음 속에서 사랑을 할당해본 적은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아. R도 결국은 사랑에 한한 이상주의자였다. 나는 R의 답변을 보고 쓰게 웃었다. 이상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나니까 그의 모든 반응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R처럼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사랑에 울고 웃고, 사랑에 살고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는데. 나는 R을 향한 은은한 측은에 젖어, 낙관주의를 한껏 비꼬며 대화하기를 택하지 않기로 했다.
- 사랑을 나누어본 적도, 재본적도 없다니. 부러워요.
내 답장에 R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접속 중이었다.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어제 미처 정리하지 못한 신발 박스가 떠올랐다. 나는 열린 옷장 앞에 쪼그려 앉아 상자를 내려다봤다. 맨 위에 놓인 사진을 편지 더미 아래로 깔고 나서 뚜껑을 덮었다. 내 사랑이 남들의 것과는 다를 거라는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 다른 사랑보다 내 사랑이 더 귀하고, 더 순수하고, 더 한결 같을 거라는 확신의 출처는 무엇인지. 내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내 사랑이 꼭 곁을 지킬 거라는 희망은 왜 가지는 건지. 정답이 없는 질문들이 있다. 내가 그런 사랑만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런 사랑이 우연히도, 운이 좋게, 나를 택해야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옷장 문을 닫고 나서 책상에 돌아오니 R의 답장이 와있다.
- 그럼 ‘총량이 정해진 사랑’에 대한 글을 써주실 수 있나요? 나에게 할당해야하는 사랑이 가장 많아야하는 이유도 그 안에 자연스럽게 녹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네, 그럼요. 걱정 마세요. R은 절대로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내 글이 완성되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가 살아가며 사랑을 쪼개야하는 순간을 한번도 마주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 고통은 모를 수록 좋다.
- 다음 주 수요일 커피 챗까지 트리트먼트 준비 가능하실까요?
네, 그것도 걱정 마세요.
- 자로 잰 듯한 사랑은 또 어떨지 기대가 됩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작가님.
네, 좋은 하루 되세요.
채팅창을 끄고 옆에 놓여있던 달력을 가져왔다. 다음 주 수요일 날짜에 동그라미를 치고 뒷 장으로 넘기니, 첫째 주 어딘가에 흐린 연필로 표시된 또 다른 동그라미 하나가 보인다.
새 계절이 시작됐고, 나는 새 글을 쓴다. 오후 산책 때 새치용 염색약을 살 것이다. 시간이 멈춘 사람 앞에서는 내 시간도 멈춘 척을 한다. 아직 내 정신도 그때에 머물러 있는 척을 한다. 기일은 항상 어렵다. 내 평생 분량의 사랑을 다 쏟아낸 이 앞에서 나 스스로에게 줄 사랑이 남아있는 척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성공한 적은 없다. 언제쯤 성공할 거라는 확신도 마땅히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