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내 꿈 속에 나타나지 말아요.
나는 이제 그 노래를 들을 수 있다. 몇 년이 걸렸는지는 굳이 셈해보지 않았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지만, 그중에 특별히 효과적이었던 것은 없었다. 그냥 시간과, 그 시간 동안 덧씌워진 다른 기억과, 그 기억에 묻어있는 다른 감정 덕분에 나는 더 이상 그 노래를 들으며 울지 않을 수 있다. 심지어는 지금 당장 새로 만나는 사람과 이어폰을 나눠 끼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야, 하고 흥얼거릴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러다가는 그를 다시 만나게 되는 어느 날,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그 노래가 듣고 싶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든다.
우리가 좋게 끝나서 다행이다. 끝장을 보고 끝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우리는 결말을 확인하기 직전에 모든 것을 정리했다. 미리 걷어본 장막 뒤가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누구는 우리를 보며 ‘시작도 전에 도망친 겁쟁이들’이라고 손가락질 할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어렸던 나도 그렇게 생각했던 날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계산적이고 영리했을 뿐이다. 우리는 무조건적 사랑을 염원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모든 사랑에 조건을 내걸었다. 그게 정답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게 틀렸다는 것도 아니지.
나는 Z가 남긴 기억들을 이용해서 글을 쓰고, Z를 미화하고 Z를 탓하며 나이 먹고 있다. 그해 겨울 Z가 잠든 나를 바라보던 그 시선에 담겨있던 복잡한 애정을 이제 아주 조금은 알 것 같다. 이 정도의 얕은 깨달음에 닿기까지 5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는데, 그때 Z와 같은 나이가 되는 내년에는 또 어떤 걸 알아차리게 될지. 시간은 나를 무뎌지게 만드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씩은 내 감은 눈꺼풀을 우악스럽게 들어올린다. 내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똑바로 쳐다보라고. 그럼 나는 마음 편히 굴복하고 사념을 허용한다.
내가 바랐던 만큼 그가 나를 좋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설령 그랬었다고 해도 이제 와서 달라지는 것은 없겠지만.
나는 아직도 배우고 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나는 많이 배웠지만, 아마 나중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게 된다면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나를 볼 때 느끼는 것처럼. 그는 그때의 그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하고 종종 생각한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먼 훗날 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면, 그때는 그에 대한 기억이 조금 뭉개질 것이다. 지워지거나 흐려진다는 건 아니다. 파란색 종이와 빨간색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서 섞는다고 그게 보라색 종이 더미가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는 파란색 종이로 남고 새로운 그 사람은 빨간색 종이로 남아있겠지. 그러면 나는 내 눈을 가린 채 종이가 든 통에 손을 넣어 무작위로 한 조각을 꺼낼 것이다. 그게 파란색이면 그를 추억할 것이고, 그냥 그를 추억하고 싶은 날이면, 빨간색 종이를 뽑아도 그를 추억할 것이다.
나는 그가 항상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나도 그럴 거니까.
*
지난 주 월요일에는 아주 오랜만에 Z를 추억했다. 슬프지 않은지는 오래 되었고, 무슨 전래동화처럼 Z 얘기를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적도 있다. 그래,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곱씹기 재밌는 기억이 있다는 것은 무료한 일상 속에서 축복과 같다. 당시에는 누가 도려내갔으면 하는 몇 개월이었는데, 지금은 그 몇 개월을 뜯어보고 찍어 먹다 못해 뼈에서 살을 분리해내 바싹 말린 육포처럼 질겅거릴 줄 안다. 시간이 그만큼 흘렀다는 뜻이다. 우리 둘에게 똑같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Z는 긴 연애를 하며 더 큰 도시로 이사를 갔고, 나는 가족이랑 친구들과 웃고 울고 떠들다가 졸업을 했다. 돈을 벌기도 하고 일을 그만 두기도 하고, 하늘이 파란 날이면 고개를 들고 숨을 돌리는 삶을 살았다. 우리 둘에게 똑같이 흐른 시간은 다른 흔적을 남겼다. 지금쯤 결혼했을까? Z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리고 나는 알고 있다. Z도 나를 두고 가끔씩은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란 걸.
잠들기 전에 맴도는 생각은 꿈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나는 그날 밤 Z에 대한 꿈을 꿨다.
유난히 시각적으로 꿈을 꾸는 탓에 내 꿈은 단 한 번도 흑백인 적 없었으며, 분위기와 감정에 따라 선명도가 달라졌다. 살인마에게 쫓기는 악몽이라면 초고화질의 영화가 펼쳐지고, 최근 꽂힌 배우와 몽글거리는 로맨스를 나눈다면 세피아 컬러가 세 방울쯤 떨어진 빈티지 필름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적당히 색이 바랜 화면 속에서 Z와 재회했다. 조금 눅눅하게 습기를 밴 기억이었다.
편한 아웃도어 웨어 차림을 한 Z와 나는 공기가 깨끗한 곳으로 여행을 가는 참이었다. 그건 아마도 Z가 어릴 적에 폐가 약해서 몇 년 동안 시골로 온 가족이 이사를 갔었다고 말해줬던 게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걸려서일 것이다. 몇 시간의 운전 끝에 도착한 산 중턱에 차를 세운 우리는 특별한 대화 없이 묘하게 흘러가는 긴장 속에서 서로를 마주봤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것은 케이블카 정류장이었다. 건물의 상아색 외벽에 써있는 글씨는 알파벳이지만 영어가 아닌 것으로 보아, 우리는 유럽 어딘가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었다. 진한 초록색 케이블카는 건물에서 멀어지며 산꼭대기로 향하고 있었다.
지대가 높아서 공기는 찼지만 햇빛이 매우 좋은 날이었다. 나는 Z의 품에 안긴 채로 -정확히는 Z가 나를 자신의 오른쪽 옆구리에 터질 듯이 끼워 안은 채로- 걷기 시작했다. 사람의 온기에 내 가슴이 터져 죽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아본 적은 처음이었다. Z가 입은 회색 윈드러너는 아주 얇아서 우리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미약하게 바스락거렸는데, 그것보다도 내 왼쪽 뺨에 닿는 Z의 심장소리가 더 커서 속이 울렁거렸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Z가 무어라 말하는 것들이 내 머리 위를 둥둥 떠갔다. 확신하건대 그건 아마 나와의 재회로 인해 넘치는 행복에서 비롯한 말들이었을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공기에 섞여 사라지는 Z의 말들을 붙잡으려 하지도 않았다. 대신 Z의 큰 보폭에 맞춰 내 보폭을 키웠을 뿐이다. 우리가 움직이는 박자가 똑같을 수 있도록 Z가 왼발을 뻗으면 나도 왼발을 뻗고, 오른발을 뻗으면 오른 발을 뻗었다. Z는 모를 내 사랑의 언어가 그렇다.
카페테리아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아 복잡했다. 다음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건지 테이블에 티켓을 올려두고 샌드위치를 급하게 씹는 젊은 여자들도 있었고, 케이블카를 이미 타고 내려와 지친 얼굴로 커피를 마시는 애아빠도 있었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카운터 위쪽에 붙은 간단한 메뉴들을 살펴보았다. 나는 햄버거 하나면 될 것 같은데, 내 말에 Z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비프로 먹을까, 했다. 마실 건 뭘로 할래? 콜라? 아니면 탄산수? 잊은 줄만 알았던 Z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니 저 멀리 기억 속에 파묻혀 있던 감정들이 올라왔다. 그 감정들이 뭐였는지 하나하나 살펴볼 수는 없었다. 그럴 필요도 없고. 빛바랜 꿈속에서의 감정이라고 해봤자 명도만 다른 희멀건 연기일 테니까 말이다.
우리는 여느 연인처럼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받았다. 오랜만에 만난 Z 앞에서 긴장한 내가 어딘가 어색하게 웃으면, Z도 나사 하나가 잘못 끼워진 것처럼 삐그덕대며 입술을 씰룩거렸다. 하지만 맞잡은 손은 절대 놓지 않은 채였다. 나를 들여다보는 Z의 눈 안에서, 아, 나는 이렇게 늦게나마 못 다한 사랑을 하게 되는구나. 빙빙 돌았지만 결국 여기 오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Z는 더 늦어지기 전에 주문을 해야겠다며 자리를 떴다.
그리고 그 뒷모습을 보던 나는 불현듯 내가 지금 꿈속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꿈의 한 중간에서 내 존재를 알아차린 적이 가끔 있었고, 이번에도 그냥 그런 경우 중 하나였다. 내가 이질감에 휩싸여 끔찍한 두통을 앓는 동안, 카페테리아 안의 타인들은 멈춤없이 움직인다. 내 세상의 현실에서도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면, 그렇게 조금 더 환상을 믿으며 살아왔다면, 나는 이 꿈속에서 Z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었을까? 무의식의 나조차도 Z와 나 사이의 모든 게 옛것으로 남아 먼지가 쌓였다는 걸 인정하고 있었나보다. 쌓인 책 더미의 표면을 문질러 먼지를 닦아낼 수는 있어도, 아래쪽에 쌓인 책을 무작정 뽑아낼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나는 Z의 곁에 앉아 맨 아래에 아슬아슬하게 끼워진 책의 표지를 만지작거리는 셈이었다. Z는 영문도 모른 채 열심히 맨 위에 새 책을 얹는 중이었고. 그때 알았다. 나는 Z와 함께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게 아니라, Z의 세상을 한번 더 뒤집어놓기 위해 이곳에 왔다는 것을.
똑같이 흐른 시간동안 Z의 세상과 내 세상은 다른 갈래로 뻗어나갔다. 새로운 일과 사람이 너무나도 많이 끼어 들었을 것이고, 그 존재들은 우리 세상이 다시 한 갈래로 합쳐질 수 없게 했다. Z와 나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이며, 나는 그저 어떠한 시공간 법칙을 위반한, Z의 세상에의 침입자에 불과했다. 머지않아 나는 다시 내 세상으로 돌아가고, Z를 Z의 시간에 홀로 남겨두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내가 쥐고 있던 Z의 세상을 원래대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했다. 똑같이 시간이 흘렀다고 해서 우리들의 시간이 결코 똑같지는 않았던 것이다. 전부 내 착각이었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재회도 있다.
여러모로 두려웠다. 내멋대로 시공간을 건너다닌 벌을 받을까봐, 내가 저지른 철없는 짓으로 인해 Z도 알 수 없는 댓가를 치르게 될까봐, Z의 머릿속에 남아있게 될 내 마지막 모습이 긴장에 절어 추해진 꼴일까봐, 아니면 다시 Z를 떠나게 될 때 한번 더 실망을 안겨주게 될까봐. 나는 여러모로 두려웠다. 내가 또 Z를 떠나야한다는 걸 알고 절망하고 있던 건, 그가 이미 주문을 마치고 내 곁에 돌아와 앉은 뒤였다. Z는 다시 내 손을 잡고 시덥잖은 이야기를 꺼내며 웃었고 나는 Z를 마주보며 웃었다. 계속 웃기만 했다. 내 웃는 모습만 기억에 남으라고. 어수선한 카페테리아 안에서도 초침 소리가 너무 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가 주문한 것들이 나오자 Z가 내 손을 놓으며 일어났지만 나는 Z의 손을 다시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 물었다.
"이제 나를 사랑할 준비 됐어요?"
Z가 답했다.
"그럼. 이제 사랑할 준비가 됐지."
그렇게 말하는 Z의 표정은 들떠있었고, 나는 Z의 손을 놓아주었다. 떠나는 마당에 아무 소용없지만, 그때는 듣지 못 했던 말을 이번에는 기어코 듣고야 말겠다는 못난 마음이었다. 넓은 보폭으로 멀어진 Z의 뒷모습을 바라보니 콧등이 싸해지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게, 이건 분명 신호였다. 나는 지금 당장 Z를 떠나, 재회를 마무리지어야 했다. 이미 바랠대로 바랜 필름에 새로 색을 입혀 코팅하려는 짓을 했다가는, 눅진 필름이 찢어져버릴 것이다. 나는 Z를 남겨두고 카페테리아에서 나와 버렸다. Z를 붕 띄워놓고, 이번에도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내 방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내가 실망에 잠긴 건지, Z가 실망에 잠긴 건지, 다른 세상의 우리가 실망에 잠긴 건지는 알 수 없다. 수면 시간은 4시간 32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