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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루리 Mar 15. 2022

밤밤언덕(12)

16

나와 소희의 행복했던 겨울이 조금씩 지나가고 어느덧 따뜻한 봄날이 눈앞에 성큼 다가왔다. 봄은 우리에게 또 어떤 추억을 안겨다 줄까? 봄이 오면 새 학기가 시작된다는 기대감에 들뜨기도 하지만 정들었던 반 친구들과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에 눈물짓기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소희와 한 반이었지만 다음 학년에도 같은 반이 될 수는 없을 테니까. 처음에는 소희와 다른 반이 되는 게 마냥 싫기만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소희와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되지 않았는가. 소희의 얼굴을 보고 싶을 때면 언제든 그녀의 집을 찾으면 된다. 실제로 최근에는 방과 후에 만남을 갖는 횟수가 더욱 많아졌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마음속에 걸리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희와의 행복한 순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소희의 생각이 무엇이든 간에 점점 내 머리는 그 사실을 지워 가고 있었다. 소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나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일이기 때문이다. 


“상우야, 담임선생님이 널 찾으셔.”


“나를? 고마워.”


“똑똑”


무슨 일일까? 나는 짧게 문을 두드리고는 교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예전에는 교무실이 왠지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는데 요즘에는 마치 우리 집 드나들 듯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자고로 사람은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담임선생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전보다 더 크고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그래, 어서 와라, 상우야.”


“네, 선생님. 저를 찾으셨다고요?"


선생님은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지 연신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너 나랑 같이 교장실로 좀 가야겠구나. 누가 너를 보고 싶어 하시거든.”


“네? 교장실이요?”


고등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교장실을 찾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누가 교장실 안을 들어가 보겠는가? 무슨 일인지 궁금하면서도 내심 왠지 모를 기대감이 생겼다.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교장선생님의 얼굴과 함께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오, 상우 왔구나. 어서 와서 앉거라.”


교장선생님은 방안에서도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고 계셨다. 담임선생님은 물론이거니와 불같은 학생주임 선생님도 교장선생님께는 언제나 깍듯하게 절을 했다. 연륜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경시대회에서 상을 수상한 이래로 교장선생님을 몇 번 뵙기는 하였지만 지금처럼 밝게 나를 맞아 주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옆에 앉아 있는 누군가의 영향인 듯했다.


“상우야, 인사하거라. 이 분은... 우리 군의 군수님이시란다. 이번에 과학경시대회에서 1등 한 학생을 개인적으로 직접 만나보고 싶다고 하셔서 말이야.”


군수님이시라고?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군수님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런데 왠지 낯설지가 않은 얼굴이다. 누구였더라? 아..


“그래, 반갑구나. 박상우라고 했지? 우리 얼굴을 한번 보지 않았었나?”


의자에 앉아 계신 분은 다름 아닌 소희의 아버지였다. 전혀 몰랐다. 소희 아버지가 군수님이셨다니. 소희와 내가 서로의 가족에 대해 일절 얘기를 안 한 탓도 있지만 그래도 어떻게 지난 몇 개월 동안 소희 아버지가 군수님이란 사실을 모를 수가 있었던가. 아직 어린 나이인지라 정치, 행정에 대해 도통 관심을 두지 않은 관계로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바보, 왜 그걸 몰랐지? 다른 사람도 아닌 소희 아버지인데.


“우리 구면인 것 같은데. 맞지? 그때 집 앞에서 봤던 우리 소희 친구.”


“네, 맞습니다. 안녕하셨어요?”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을 하고자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군수님, 아, 아니 소희 아버지가 내미는 손을 조심스럽게 맞잡았다.


“하하, 맞아. 내 눈이 정확하구나. 소희에게 이렇게 멋지고 똑똑한 친구가 있었는지 몰랐는걸. 반갑구나. 밤늦은 시간에 짧게 본 것뿐이라 긴가민가 했지만 사실, 그때 말고도 자네를 종종 보았었거든.”


“네? 저를요?”


소희 아버지는 한껏 크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그래. 늦은 밤이면 종종 소희를 집에 데려다 주었잖니? 나도 눈치가 있는지라 그 이후에는 그냥 모른체하고 있었단다.”


“아, 그러셨군요. 죄..송 아니, 감사합니다.”


감사한다는 말이 맞는 걸까? 어느새 나의 얼굴은 수줍은 아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최근 들어 모든 일에 자신만만했던 나에겐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소희 아버지를 단둘이 마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등 뒤에 식은 땀이 흘러내렸다.


“이거 내 정신 좀 보게. 오늘은 축하를 해 주기 위해서 자리를 마련한 건데 괜히 이상한 소리만 하게 되는구나. 내가 좀 주책이지? 미안하다.”


“아니에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그 후로도 우리의 대화는 오랜 시간 동안 이어졌다. 소희 아버지는 내가 교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까마득히 잊어버리신 듯 이것저것 사소한 이야기들까지 스스럼없이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에 대해서도 이것저것 물어보셨다. 내 대답에 감탄을 하며 맞장구를 쳐 주시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들어 주시기도 했다. 우리의 얘기가 한참이나 길어지자 잠시 자리를 비우셨던 교장선생님은 다시 방안으로 들어오시며 헛기침을 하셨다. 그제야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걸 깨달으신 소희 아버지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이거 내가 엄청나게 실례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교장선생님, 상우 군의 귀한 시간을 이렇게나 오래 뺏어 버리다니. 정말 미안하구나. 상우야. 내가 그렇게 불러도 되겠니?”


“네, 물론이죠. 그리고 괜찮습니다. 덕분에 저도 감사한 얘기를 많이 듣고 좋은 시간을 보냈어요. 감사합니다.”


소희 아버지뿐 아니라 교장선생님도 내 대답이 마음에 드셨는지 흡족한 미소를 지으셨다. 처음에 소희 아버지를 마주할 때 느꼈던 긴장감은 어느새 멀리 달아나 버렸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소희 아버지가 마치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편하게 느껴졌다. 소희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 보던 모습만큼이나 인자하고 자상하신 분이었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그랬다.    

 

17 

“아저씨, 이것 좀 와서 봐 주세요. 기계는 정상적으로 작동이 잘 되는데 왜 이렇게 제품이 균일하지 않은 걸까요?”


명훈은 옆자리의 젊은 근로자가 말하는 대로 완제품 박스의 제품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정말 그러네요. 이상한데.”


명훈은 프레스 기계를 멈춰 세우고 사출구 곳곳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에어건으로 쓱쓱 먼지를 털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트레이에 계속 이물질이 끼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이번 원재료 품질이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작업할 때마다 매번 에어건으로 청소를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항상 그래야 하는 거예요? 이거 귀찮아지네. 고마워요. 아저씨.”


“뭘요.”


명훈은 뿌듯한 듯 해맑게 웃으며 이마 위로 흐르는 땀을 쓱 닦아 냈다. 옆자리에서 기계를 조작하며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훈은 이내 고개를 흔들고 말았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지난 두어 달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회사에 들어온 지 반년밖에 되지 않은 박 씨 아저씨가 마치 십수 년을 근무한 직장님의 직을 대신하듯 공장 구석구석 속속들이 알고 있느냔 말이다. 게다가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를 적대시하던 직원들이 지금은 그 누구보다 믿고 따르고 있으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훈은 일주일 전 태석과 명훈을 만난 이후 다시금 공장에 복귀하여 일을 하게 되었다. 지난 불미스러운 사건의 주범이 지훈이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명훈과 태석이 나서서 직장님께 말을 잘 해 준 덕분이었다. 병욱은 평소와는 다르게 전혀 화를 내지 않고 별말 없이 자신을 받아 주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알지?”


그 말이 전부였다.


“네, 그럼요. 잘 알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직장님.”


지훈은 넙죽 엎드려 절을 하였다.


“나한테 감사할 필요는 전혀 없어. 감사는 박명훈 씨에게 해야지.”


명훈이 태석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과장 섞인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태석은 원체 과장이 심한 사람이 아니던가. 요즘 세상에 누가 자신의 몸을 다쳐 가며 남을 돕는단 말인가.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흘려 들었지만 직장 동료들의 얘기는 한결같았다. 명훈이야말로 진정한 회사의 영웅이라고. 한 사람에 대한 일반의 시선이 이렇게나 쉽게 뒤바뀔 수가 있는 것인가? 지훈은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장난처럼 느껴졌다.


퇴근을 2시간 앞둔 철야 마지막 작업시간은 근로자들에게 극한의 한계를 경험케 한다. 그야말로 기진맥진이 되고 만다. 내가 지금 기계를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기계가 나를 작동하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지훈은 단지 2달만 쉰 것뿐이었는데 이렇게 몸이 달라져 있을 거라곤 미쳐 생각지 못했다. 철야를 하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이 되자 온몸이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다. 어서 시간이 지나가기를.. 1시간만 더 지나면 집으로 가서 푹 잠을 자야지. 푹 잠을 잘 거야. 그렇게 무심코 잠이 들어버린 지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프레스 기계 버튼을 무작정 누르고 있었다. 그때, 명훈이 황급히 지훈의 곁으로 달려와 달궈진 원재료를 들추어 냈다. 그러고는 기계 옆에 매달려 있는 지훈의 손을 얼른 밖으로 내려놓았다.


“얌마, 정신 차려.”


누군가의 호통소리가 귓가에 울리자 지훈은 부릅 눈을 뜨며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앞에는 성난 황소와도 같은 우락부락한 표정의 병욱이 두 눈을 부라리며 자신을 노려 보고 있었다.


“너, 인마 어디 정신을 팔고 있는 거야? 너 지금 박 씨 아니었으면 손가락이 잘릴 뻔했어. 알아?”


“아. 그럴 리가.. 정말요? 죄.. 죄송합니다.”


지훈은 지난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간 건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1년 6개월 전, 처음 공장에 일을 하러 왔을 때도 이러지는 않았다. 꼭 뭔가에 홀린 기분이다. 직장님이 마지막 기회라 했는데. 다음 주부터는 좀 더 바짝 정신을 차려야만 한다. 지훈은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고 공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통근버스를 기다리는 동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그러나 그들과 한참을 떨어져서 혼자 발걸음을 재촉하는 명훈의 모습이 지훈의 눈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훈은 어떻게든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자 통근버스를 지나쳐 명훈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냥, 스무 걸음쯤 뒤에서 명훈의 뒷모습을 바라본 채 뒤따라갈 뿐이다. 5분쯤 걸었을까? 앞서 걷던 명훈이 뒤따라오는 지훈을 발견하고는 멈춰서 뒤를 돌아 보았다. 지훈은 흠칫 놀라고 말았지만 명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지훈 씨, 왜 버스 안 탔어요?”


“아.. 그게요. 좀 걷고 싶어서요. 그러는 아저씨는요?”


“저는 원래 걸어 다녀요. 집이 멀지 않거든요.”


“아, 그랬구나.”


둘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지훈은 멈칫멈칫하며 말할 기회를 엿보았으나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말없이 또 5분쯤 걷자 마을과 마을이 나뉘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명훈은 걸음을 멈추고 지훈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전 이쪽으로 가야 해요.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읍내로 나가는 버스정류장이 있거든요. 지훈 씨는 거기서 아무 버스나 타면 될 거예요."


할 말을 마친 명훈은 자신의 임무가 끝났다는 듯 지훈에게 꾸벅 절을 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바로 그때,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명훈의 팔을 붙잡고 말았다. 지훈은 스스로가 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붙잡고 있던 명훈의 팔을 놓고는 꼭꼭 닫혀 있던 자신의 입을 억지로 열었다.


“고.. 고마워요. 아저씨. 그 말 하려고 따라왔어요.”


“네? 정말요? 근데 뭐가요?”


명훈은 지훈의 얼굴을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그냥 알겠다고 해 주면 좋을 텐데..


“그냥, 이것저것 다요. 오늘 저 도와주신 것도 그렇고, 다시 일하게 해 주신 것도 그렇고.”


명훈은 또 묘한 표정을 짓고 있다. 지난번에 짓던 표정과 똑같았다. 한참만에야 명훈이 입을 열었다.


“지훈 씨, 혹시 단팥빵 좋아해요?”


“네?”


“읍내에 맛있는 빵집이 있는데 우리 그거 먹고 갈래요?” 


지훈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팥빵이라.. 왠지 오늘 먹을 단팥빵이 참 맛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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