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소희는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전화로 감기 몸살이라고 말했다. 통화를 할 때마다 소희의 목소리는 깊게 잠겨 있었다. 단순 감기로 이렇게나 몸이 안 좋을 수가 있을까? 점점 소희의 몸 상태가 걱정이 되었다. 나는 몇 번이고 병문안을 가겠다고 말했지만 소희는 한사코 나의 방문을 만류했다. 괜히 나까지 감기가 옮을까 봐 걱정이라고 말이다. 그러고는 며칠 안에 건강한 모습으로 학교에 나가겠다며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프지 말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평범한 말을 전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무력하게만 느껴졌다. 그녀를 위해 뭔가를 더 해주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그날이 다가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한가롭게 책을 읽고 있었다. 소희가 바로 옆에 와 있는 것도 모른 채.
“상우야, 상우야.”
종수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정신없이 달려와 숨을 헐떡였다.
“상우야. 어떻게 된 거야? 너 알고 있었어?”
“응? 뭔데 그래?”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곁눈질을 하며 말했다.
“표정 보니까 너 모르고 있었구나. 소희, 다른 학교로 전학 간대. 지금 전학 수속 밟고 짐 챙기러 왔다나 봐.”
“뭐,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너 정말 몰랐어?”
깜짝 놀랐다. 아니, 단순히 놀랐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할 뿐이었다. 소희가 전학을? 말도 안 된다. 어떻게 나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전학을 간단 말인가? 순간, 지난 며칠간 소희가 아파서 결석을 한 것이 그 때문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니, 아니야. 지금 내 머릿속에 가득한 의구심이 정말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선 당장 소희를 만나야만 한다.
“그래서, 지금 소희가 학교에 온 거야? 소희 어디 있어?”
나는 수업종소리가 울리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희는 전학 수속만 밟고 학교를 떠나버린 후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소희의 이름이 적힌 통화 버튼을 연거푸 눌렀다. 소희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야, 박상우. 수업종소리 못 들었어? 어서 들어오지 않고 뭐 해?”
등 뒤에서 선생님의 호통소리가 이어졌다. 그러나 나는 고분고분 선생님의 말씀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모범생은 아닐지언정 어른들의 말을 거역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나를 붙잡는 선생님의 손을 뿌리치고 학교 밖으로 뛰쳐나갔다.
소희 집 대문은 굳건히 잠겨 있었다.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벨을 눌렀다. 인터폰 화면으로 내 모습을 확인한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한 번 더 벨을 누르고는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환하게 밝았던 하늘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소희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은 가는 시간을 붙잡지 못했다. 밤하늘의 달빛이 나의 마음에 더 큰 쓸쓸함을 안겼다. 그러는 사이 소희 집의 거실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가 거실 안팎을 서성이고 있다. 소희일까? 여전히 대답은 없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뿐이었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어느새 소희 집안 거실과 방안의 불빛이 모두 꺼져 버렸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서성이다가 자정이 넘어서야 힘겨운 발걸음을 돌릴 수 있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는 소희의 집을 찾았다. 3일째 되던 주말 아침에는 잠시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무작정 대문을 두드렸다. 소희를 만나야만 한다.
“소희야, 소희야.”
한참이나 대답이 없던 인터폰에서 마침내 낯설지 않은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상우 군인가?”
소희 아버지였다.
“아. 소희 아버님. 저, 소희 좀 만나게 해 주세요. 부탁입니다. 소희가 얼마나 아픈 건가요? 대체 왜 전학을 가는 건가요?”
인터폰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만 돌아가게.”
“저.. 저기요.”
인터폰은 일말의 배려도 없다는 듯 그대로 끊겨 버렸다. 나는 몇 번이고 대문을 더 두드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소희는 나의 마음과 같지 않은 것일까? 나는 이토록 가슴이 타들어갈 것만 같은데 그녀는 전혀 아닌 걸까?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대체 다 무슨 소용인가? 의구심은 허탈함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녀의 마음이 나와 같지 않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젊은 시절의 열병은 지나가 버리면 그만인 것이다. 나는 일백 번도 넘게 왔다 갔다 하는 나의 마음을 부여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허탈한 마음을 한사코 더 부추기는 것은 결국 나 자신이었다. 그렇게 소희의 집을 찾은지 4일째 되던 날, 나는 나의 마음과 함께 힘없이 소희의 집을 돌아서고야 말았다.
“상우야, 어서 일어나렴, 오늘 함께 대청소를 하자고 했잖니.”
엄마는 아침부터 집안팍의 문이란 문은 모두 다 활짝 여시고는 어서 일어나라며 내 엉덩이를 두드리셨다. 소희 때문에 심란하기만 한 내 마음도 모르시고. 주말 아침인데 좀만 더 잠을 자면 안 될까요? 잠을 더 자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고 싶어서 오늘은 좀 쉬게 해달라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야만 했다. 소희는 지난주에도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학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기 때문에 굳이 학교에 나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다음 주면 새 학기가 시작되니까 새로 전학을 가는 그곳 생활에만 집중하고 이곳에서의 생활은 정리하고자 결심을 한 것이 분명하다. 나를 포함해서. 지난 한 주 동안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해 가야 할 방향을 잃어버렸다. 어쩌면, 지난 몇 개월간 겪었던 모든 일들이 다 꿈일지 모른다. 아버지가 출소를 하신 이후, 나에게는 여자친구가 생겼고 학교에서는 친구들의 환호에 둘러싸였다. 소희와 함께 평생 잊지 못할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의 조용했던 삶이랑 전혀 다른 방향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통에 이게 과연 내 삶이 맞는 것인지 의아하기만 했다.
활짝 열린 내 방 창문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오늘은 비번이신 아버지도 대청소를 하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침대에 누워서 거실을 바라보는 사이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주에도 철야작업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주무셨을 텐데 아버지는 피곤하지도 않으신 모양이다. 나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트레이닝복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상우 일어났니?”
나를 발견하신 아버지가 반갑게 웃으시며 말했다.
“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나도 어떻게든 마음을 추스르고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내가 미소를 짓던, 얼굴을 찡그리든 간에 상관없이 항상 밝게 웃기만 하셨다. 오늘은 더더욱 표정이 밝아 보였다. 고작 집 안 청소를 같이 하는 것뿐이지만 우리 가족이 오랜만에 힘을 합쳐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분이 남다르게 느껴지시는 것 같았다.
“점심때는 내가 맛있는 짜장면을 만들어 줄게. 상우, 짜장면 좋아하지? 내가 어제 집에 오면서 재료를 사 가지고 왔거든. 중국집에서 먹는 짜장면이랑은 비할 바가 없겠지만 그래도 엄청 맛있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했다.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짜장면이든 짬뽕이든 지금 먹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는가. 마음이 이렇게 공허하기만 한데.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반나절 가까이 집안 구석구석을 청소하고 나니 없는 식욕도 되살아 나 버렸다. 나는 앉은 자리에서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짜장면을 2그릇이나 비워 버렸다.
“우리 상우, 요즘 덩치가 점점 더 커지더니 먹는 양도 많이 늘었구나. 아버지가 해 주시는 게 맛이 있니?”
할머니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나는 무심코 아버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어린아이와도 같은 표정으로 내 대답을 기대하듯 나를 쳐다보고 계셨다.
“네, 맛있어요. 아버지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그제야 자신의 그릇에 한가득 짜장면을 담아 드시기 시작하셨다.
오후가 되자 날이 험상궂게 흐려졌다. 일기예보에서는 밤늦게 비가 올 것이라고 했다.
“상우야, 엄마는 빨래를 걷어야 할 것 같구나. 저기 공구상자 좀 창고에 가져다 놓겠니?”
“네, 알겠어요. 엄마.”
나는 엄마가 일러주는 대로 드라이버며 망치며, 오전에 집안 곳곳을 수리하려고 사용한 공구박스를 창고로 가지고 갔다. 마음먹고 청소를 한 탓에 창고 안까지 예전과는 전혀 다르게 말끔히 정리 정돈이 되어 있었다. 나는 공구상자를 서랍장 안에 집어넣고는 돌아섰다. 그때, 선반 위에 놓인 낯설지 않은 작은 가방 하나가 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잠시 생각해 보니 가방의 정체가 무엇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아버지가 출소하시던 날, 당신은 신줏단지 모시듯 품 안에 무언가를 꼭 안고 계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잊어버리긴 했지만 처음 며칠간은 아버지가 품 안에 안고 계신 가방의 정체가 무엇인지 내내 궁금했었다. 일주일 전 들었던 엄마의 화난 목소리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니, 저놈의 가방 안에는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예요? 나한테 보여 주지도 않을 거면 좀 치워 버려요.”
지난 몇 개월간 안방에 고이 간직해 놓았던 그 가방을 대청소 핑계로 창고에 가져다 놓으신 모양이다. 그래도 여전히 소중한 보물이라도 되는 듯 정갈한 박스 안에 고이 모셔 놓았다. 순간 작지 않은 호기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과연, 저 가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무엇이 들어 있길래 품 안에 꼭 안고 가지고 나오신 걸까? 가방 앞으로 다가간 나는 멀리서 인기척이라도 들리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혹시라도 내가 몰래 당신의 가방을 열어 봤다는 사실을 아버지가 알게 되신다면 분명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어쩌지? 열어 볼까? 한참을 망설이던 나는 마침내 결심을 하고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가방 안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버지가 소중하게 간직하신 가방이었으니 애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건 아닐 것이다. 어딘가에 옮겨 놓으신 걸까? 한참을 고민하며 고개를 갸웃하던 그때, 정적을 깨뜨리려는 듯 주머니 속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폰을 꺼내어 보았다. 핸드폰 화면에는 지난 열흘간 단 한 번도 울리지 않았던 소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소희의 목소리는 힘없고 갸날펐다. 분명 적잖은 눈물을 흘린 탓이리라. 그녀의 마음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소희는 밤 9시에 나를 보러 나오겠다고 말했다. 그 시간에만 가능하다고 말이다. 무언가 연유가 있는 탓이겠지. 나는 밤 9시가 되기 한참 전부터 그녀의 집 앞에 먼저 나와 소희를 기다렸다. 시간이 이렇게 더디게 흐를 수가 있을까? 10분, 20분 소희와의 만남을 기다리는 그 시간이 나에게는 더없는 곤욕이었다. 밤 8시 50분쯤, 소희의 집에서 차량 한 대가 슬며시 빠져나갔다. 나는 소희의 집 앞 나무 뒤에서 떠나는 승용차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소희의 부모님이 차량에 탑승해 계신 것 같다. 그리고 정각 9시가 되자마자, 소희가 대문 밖으로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소희의 집 앞으로 달려가 나도 모르게 그녀를 와락 껴안고 말았다. 소희도 참고 있던 울음이 터져 나온 듯 훌쩍이며 나를 꼭 껴안았다.
“상우야, 미안해.”
“아냐, 아냐. 내가 미안하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소희를 보자마자 여러 가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소희가 전학을 가게 된 이유는 내가 생각하던 최악의 수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다. 아버지의 반대 때문이라니. 일전에 소희 아버지와 독대를 하고 난 후, 소희 아버지는 나에 대해 좀 더 상세히 조사를 하신 모양이다. 분명 어렵지 않게 내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셨을 것이다. 깜짝 놀란 소희 아버지는 며칠간 고민을 하시다 소희에게 조용히 나와의 만남을 만류하셨다고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소희는 아버지의 권유를 거부했다. 괜찮다고,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말이다. 그러나 당신의 체면과 명예를 그 무엇보다 중시하는 소희 아버지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더군다나 재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군수직의 입장에선 더더욱 그러했다. 딸아이가 살인자의 아들과 사랑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소희 아버지에겐 더없는 치욕이었던 듯하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좋은 조건이다. 내가 경시대회에 참가하게 된 것을 소희가 탐탁지 않아 했던 이유도 이제야 설명이 되었다. 소희 아버지는 젊은 인재들을 발굴하는 사업에 유독 관심이 많으셨다. 소희 입장에서는 내가 아버지와 만남을 갖게 되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싶었다. 여하튼 소희와 아버지의 냉전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급기야 아버지는 마지막 수를 던지고야 말았다. 그게 소희의 전학이었다. 202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시점에서도 이런 고리타분한 발상을 할 수 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막상 그게 내 자식의 일이라면 분명 다를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인생에 큰 타격이 될지도 모를 내 아버지의 존재를 애써 숨기기 위함이다. 소희는 다음 주에 큰아버지 집으로 거처를 옮긴다고 말했다. 당장은 부모님과 떨어져 살게 된다고 말이다. 청춘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런 때에 사랑의 도피를 하던데. 우리는 전혀 달랐다. 기본적으로 소희는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상우야, 나 지금 소원이 있어. 들어 줄래?”
소희는 마지막으로 우리의 행복한 추억이 어려 있는 밤밤언덕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밤이 깊었는데다 날도 흐렸지만 나는 소희의 바램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러자.”
우리는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한 채 늦은 밤, 언덕 위를 올랐다.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내가 소희를 위해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날이 흐린 탓에 밤밤언덕 정상에 올라서도 기분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밤하늘은 고사하고 당장 눈앞의 시야도 제대로 밝힐 수가 없었다. 지난번 우리가 함께 했던 그 날밤의 추억만 생각했던 탓인지 소희의 표정은 이내 시무룩해져 버렸다. 나는 뭔가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정작, 위로는 내가 받고 싶었지만.
“소희야, 괜찮아?”
“응.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지 않아.”
“그렇지? 나도 그래.”
소희의 얼굴에 전에 없던 쓸쓸함이 어렸다. 지난 며칠 사이 많이 아팠던 모양인지 얼굴도 더 핼쑥해 보였다. 우리는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언덕 위는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소희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나, 우리 학교에 정이 참 많이 들었었는데. 여기가 참 좋았는데 어떡해. 상우야. 나 정말 가기 싫어.”
소희는 점점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모양인지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했다.
“나도 그래. 소희야. 너랑 정말 헤어지기 싫은데. 너희 아버지가 대체 왜 그러시는 걸까? 굳이 그러셔야만 하는 거야?”
쌩하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날은 점점 더 추워만 갔다. 나와 소희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소희의 감정은 점점 극을 향해 치달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내가 그랬잖아.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자고. 그냥 이렇게 남들 모른 채 지내자고. 그런데 네가 어겼어. 나는 아무런 힘이 없단 말이야."
눈물을 글썽이던 소희는 점점 격앙된 톤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추위에 떨고 있는 소희를 안으려 했지만 소희는 내 손을 거부했다. 열흘 만에 정말 어렵게 만났는데 왜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누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는 이 상황이 너무나 싫었다.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너희 아버지는 우리가 사귀고 있다는 걸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셨다고. 그런 상황에서 내가 뭘 어쩌겠어? 거짓말이라도 했어야 하는 거야?”
“아니라고 끝까지 우겼어야지. 내가 그러자고 했잖아.”
소희가 하는 말이 점점 더 야속하게만 들렸다. 대체 내가 잘못한 것이 뭐란 말인가? 그럼 어른이 물어보시는 데 무턱대고 거짓말만 하라는 말인가. 아니, 그걸 다 떠나서 애초에 왜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비밀연애를 해야만 하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소희 아버지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은 급기야 소희에게로 방향을 틀고 말았다. 소희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나의 마음은 한낱 어린아이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남들 모르게 연애를 하는 게 오로지 소희 아버지 때문이라고? 아버지가 아시면 안 되니까?”
“그래, 맞아. 우리 아버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체면이 중요할 때란 말이야. 그게 상대방 진영에선 좋은 빌미가 될 거라고 하셨어. 그래서 어떻게든 비밀로 하자고 한 건데.”
“그럼 그다음은? 언제까지 비밀로 할 건데?”
“그.. 그건”
소희는 작아진 목소리로 말을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영원히 우리가 사귀는 건 아무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사는 거야? 정말 그걸 원하는 거야?”
“지금,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잖아. 우리가 나중에 성인이 되고 주체적으로 삶을 결정할 수 있게 되면 충분히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은 아니잖아. 지금은 아버지 도움 없이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우린 아직 미성년자인데다..”
“우리가 성인이 되려면 아직 2년이나 남았어. 그리고 대학생이 되어도 당장은 아버지 그늘을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건 마찬가지 아냐?”
소희는 잠시 움찔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럼, 나더러 어쩌라는 거야?”
“소희 너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봐. 정말 너희 아버지 때문이야? 그게 전부인 거야? 우리 아버지를 마냥 피하고 싶은 거 아니냐고?”
소희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난 왜 내 여자친구한테도 이렇게 떳떳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손가락질해도 소희 너만은 나를 믿어줄 거라 믿었어. 나도, 우리 아버지도. 근데 아니었잖아.”
“상우, 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우리 아버지를 만나는 게 끔찍했다며. 우리 아버지가 차라리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아닌 척하지만 너도 다른 애들이랑 마찬가지인 거 아냐?”
나는 오랫동안 참아왔던, 내색하지 않겠노라 몇 번이나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그 말을 입 밖에 꺼내고야 말았다. 정말, 하지 말았어야 할 그 말을.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소희는 한참 동안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설마, 너 내 일기장을 본 거야?”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말 그런 거야?”
소희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졌다. 이번에는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이 느껴졌다.
“그게 지금 중요해? 네가 우리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거잖아.”
“박상우. 정말 실망이다. 어쩜 그럴 수가 있어?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기 전에 너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해. 넌 정말 너희 아버지가 떳떳했니? 그래서 아버지와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사이가 좋아? 그래, 말이 나왔으니까 사실대로 말할게. 난 솔직히 부담스러워. 내내 신경 쓰였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매일매일 고민하고 또 고민했어. 네 말이 맞아. 아닌 척 얘를 쓰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남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나 봐. 처음엔 나도 우리 아버지가 왜 이렇게까지 하실까 밉기만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까 충분히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아버지 욕할 것 없어. 우리 아버지는 적어도 너희 아버지 같은 살인자는 아니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소희 역시 감정이 격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나온 말일 테지만 난 그 말을 듣자마자 우리의 관계가 여기서 끝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희의 뺨을 때려 버렸다. 왜 그랬는지 정말 모르겠다. 결단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 그 순간의 나는 내가 아니다. 소희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인 채 자신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우중충했던 하늘에서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의 누군가가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것처럼 딱 지금 이 시점에. 얼굴에 쏟아지는 비를 맞자, 잃어버렸던 나의 이성이 조금씩 내 몸 안으로 되돌아왔다.
“소.. 소희야.”
소희는 나를 홀로 남겨 두고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나는 잠시 동안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뺨을 맞은 소희보다 내가 더 큰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내 손을 쳐다보았다. 미친 놈. 지금 이 순간, 난 인간도 아니다. 저 멀리 뛰어가는 소희의 모습이 시야에서 거의 사라질 때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소희의 뒤를 쫓아갔다. 지금 소희를 붙잡지 않으면 다시는 그녀의 얼굴을 보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소희야. 소희야.”
나는 소희의 이름을 부르며 한참이나 언덕 내리막길을 뛰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는 데다 밤이 깊어져 눈앞에 있는 그 무엇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 가고 있는 이 방향이 맞는지 아닌지도 알 수가 없었다. 엉뚱한 방향으로 뛰어가는 게 아닐까? 나는 아무것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앞서 뛰어가는 소희의 뒷모습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한참만에야 소희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소희야, 나 좀 봐. 미안해. 내가 이성을 잃었나 봐.”
소희는 내가 잡은 손을 힘겹게 뿌리쳤다.
“이거 놔. 놓으라고.”
그때였다. 갑자기 쏟아진 비로 언덕 위의 토사가 쓸려 나가면서 내 손을 뿌리치던 소희가 언덕 아래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짧디짧은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들렸지만 이내 빗소리에 파묻혀 버렸다. 정말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다. 나는 내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소희의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실재하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지? 얼마나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일까? 나는 오열하듯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억수같이 내린 빗소리에 파묻혀 내 목소리도, 소희의 목소리도 전혀 들리지가 않았다.
“소.. 소희야, 소희야. 어디 있어?”
나는 실성을 한 사람처럼 소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핸드폰. 핸드폰 플래시로 시야를 밝혀야 하는데.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호주머니 곳곳을 뒤져 봐도 핸드폰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 보이지가 않았다. 소희를 붙잡으러 급히 달려오던 중에 어딘가에 떨어뜨려 버린 것이 분명하다. 나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 흙탕물에 몸을 맡겨 사방팔방 소희를 찾아 헤맸다.
“소희야, 어디 있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제발 말 좀 해줘.”
빗물과 함께 뒤섞여 버린 탓에 나는 내가 지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여전히 언덕배기 곳곳을 휘젓고 다녔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이 지났을 것이다. 정신없이 소희를 찾아 헤매던 나는 그제야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마을로 내려가 사람을 데려오려면 적어도 1시간 이상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이대로 소희를 혼자 놔두고 마을로 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다. 순간 겁이 나기 시작했다. 만약, 이대로 영영 소희를 되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분명 그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고 있기만 했다. 그 순간, 멀지 않은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들렸다. 빗소리에 섞여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나는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음악소리였다. 나는 다시 한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여기요, 도와주세요.’라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정말 사람이 있었던 건지, 아니면 내가 헛것을 들었던 건지는 알 수가 없다. 설령 근처에 사람이 있었다 한들 그 사람은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린 듯하다. 나는 또다시 고함을 질렀다.
“여기 사람이 다쳤다고요. 도와주세요.”
비 오는 새벽, 아무도 없는 어두컴컴한 언덕 위에서 나는 목청이 부서지게 울부짖었다. 새벽은 그렇게 길고도 길었다. 그리고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