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드루리 Sep 27. 2022

밤밤언덕(23_마지막)

34

명훈은 아까부터 계속해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분명 방안에 있을 텐데 보이지가 않는다. 다른 곳에 가지고 나가지는 않았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걸까?


“당신, 뭘 그렇게 찾는 거예요?"


미주가 묻자 명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대답했다.


“저기, 혹시 내가 가지고 왔던 가방 어디 있는지 알아? 여기 장롱 안에 넣어 두었었는데 보이지가 않아서.”


“그거 내가 치워 버렸어요.”


“뭐?”


깜짝 놀란 명훈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 가방이 어떤 가방인가. 10년 동안 모든 순간을 기록해 둔 소중한 편지가 들어 있는 가방인데. 상우에게 보여 주지도 못했건만 이대로 떠나보내야만 하는 걸까? 순간 명훈은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몸이 축 늘어져 버렸다.


“대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길래 그렇게 죽을 상을 하는 거예요? 자물쇠로 잠가 놓고서는 나에게 보여 주지도 않을 거면서.”


“미안해. 그게 말이야."


“안 버렸어요. 창고 선반 위에 올려 뒀어요. 내가 좀 치우라고 했었잖아요. 거기 가져다 뒀으니까 다시 방안으로 가지고 올 생각일랑 하지 말아요.”


명훈은 반색하며 창고로 달려갔다. 창고 선반 위에 그토록 찾던 가방이 올려져 있었다. 명훈은 자신도 모르게 가방을 꼭 껴안았다. 그러고는 자물쇠를 열어 가방 안의 편지들을 꺼내 보았다. 잠시 옛 기억에 사로잡힌 채 편지를 읽는 동안 명훈은 의구심이 생겼다. 과연 내가 이 편지들을 상우에게 보여 줄 수 있을까? 전혀 그럴 것 같지가 않다. 어쩌면 이 편지를 품 안에 안고 있는 것이 나의 괜한 고집 때문일는지 모른다. 이제는 보내주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계속해서 옛 기억에 매몰되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 교도소 생활에 더 이상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는가. 명훈은 이제 그만 편지들을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공장에 물량이 넘쳐 나는 관계로 오늘의 과업은 오전에 종결되었다. 병욱은 오랜만에 생산반 직원들을 소집해서 회식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명훈 씨, 명훈 씨도 같이 가요. 오늘 점심 먹고 다 같이 볼링이라도 치려고 하는데. 전에 보니까 명훈 씨 실력이 괜찮더라고요."


“그래요. 아저씨 같이 가요.”


옆에 있던 태석과 지훈이 명훈의 손을 잡아끌었다. 명훈은 웃으며 조용히 손을 흔들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제가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다음번에 꼭 참석할게요.”


병욱은 이내 시무룩한 얼굴로 대꾸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요? 빠지면 안 되는 일인가요?”


“네”


명훈은 두 손을 모으고는 정중하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렇담 어쩔 수 없죠. 혹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죠? 행여 안 좋은 일이 있는 거면 꼭 얘기하세요. 우리가 도와줄 테니까. 알겠죠? 아저씨.”


“네, 그럼요.”


명훈은 웃는 얼굴로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다. 명훈은 가만히 서서 멀어지는 그들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나도 이제 저들 사이에서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소중한 일원이다. 명훈은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졌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빨리 집에 가서 계획한 일을 실천에 옮기려면 바삐 움직여야만 한다.   

   

명훈은 박스 안에 옮겨 담은 편지와 삽을 들고 길을 나섰다. 지난 10년의 소중하고 아픈 기억들을 이제는 보내주려고 한다. 이 편지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오랫동안 생각을 한 끝에 아들과 추억을 공유한 밤밤언덕에 묻겠다고 결심했다. 아무렇게나 손닿는 곳에 방치해 버리기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다. 밤밤언덕에 묻어 둔다면 이 편지가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나에게 무한한 힘을 가져다줄 것만 같았다. 분명 그게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명훈은 열심히 산을 올랐다. 드디어 밤밤언덕 정상에 다다른 명훈은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 앉아 잠시 지친 발걸음을 쉬었다. 산들바람이 명훈의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요 며칠 새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오늘은 날이 화창해서 다행이다. 명훈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저 멀리 우리 집이 보일 것만 같다. 마침내 명훈은 삽을 꺼내어 커다란 밤나무 아래 시야가 드넓게 트인 곳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한참 동안이나 땅을 팠다.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진다. 아무 생각 없이 작업에 열중한 탓인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명훈은 박스가 충분히 들어갈만한 크기의 구덩이를 쳐다보며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박스 안에 담긴 10년의 세월을 고스란히 그 안에 묻었다. 괜찮아. 이거면 된 거야. 편지를 묻고 나면 마음이 허전할 것만 같았는데 지워 버리고 싶었던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그 어느 때보다 머리가 맑아졌다. 명훈은 나무 옆 바위에 잠시 앉아 사색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내일은 우리 가족이 다 함께 대청소를 하기로 한 날이다. 회사 동료들뿐 아니라 가족들과도 매일매일 더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어색했던 아들과의 관계도 조금씩 말문이 트인다. 명훈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산속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고 땅에 떨어졌다. 명훈은 이보다 더 기분이 상쾌할 수가 없었다.

명훈은 집으로 가는 길에 시장에 들렀다. 내일 우리 가족을 위해 짜장면을 만들 생각이다. 교도소에서 틈틈이 배운 덕에 나름 요리를 잘 한다고 자부했는데 그중 가장 자신 있게 만들 수 있는 요리가 바로 짜장면이었다. 명훈은 상우가 자신이 만든 짜장면을 맛있게 먹는 광경을 생각하니 저절로 웃음이 났다.      


“엄마는 쉬고 있어요. 제가 엄마방까지 다 청소할게요.”


명훈은 신이 난 듯 아침 일찍 일어나 여기저기 청소를 시작했다.


“명훈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신이 났누?”


“신이 날 수밖에요. 우리 집이 깨끗해지는데.”


명훈은 오랜만에 상희의 어깨를 주무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여보, 그러면 먼저 거실에 청소기부터 돌려줘요. 그다음에는 내가 걸레질을 할 테니까.”


미주가 명훈에게 청소기를 건네주며 말했다. 명훈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이거 시끄러울 텐데. 아직 상우가 자고 있거든.”


“괜찮아요. 상우 방금 일어났으니까.”


“그래?”


명훈은 거실로 나오는 상우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했다.


“상우야, 잘 잤니?”


“네, 아버지 안녕히 주무셨어요?”


명훈은 오랜만에 아침부터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무언가를 함께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행복이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점심때는 내가 맛있는 짜장면을 만들어 줄게. 상우, 짜장면 좋아하지? 내가 어제 집에 오면서 재료를 사 가지고 왔거든. 중국집에서 먹는 짜장면이랑은 비할 바가 없겠지만 그래도 엄청 맛있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명훈은 온갖 정성을 기울여 짜장면을 만들었다. 오늘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맛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우리 가족에게 처음으로 만들어 주는 요리니까. 아니나 다를까. 엄마와 아내는 물론이고 상우까지 짜장면을 참 맛있게 한 그릇 가득 비워냈다. 이제야 내가 우리 가족에게 가장 노릇을 하게 되었구나. 명훈은 이보다 더 뿌듯할 수가 없었다.      


전혀 힘들지는 않았는데 어제, 오늘 나름 긴장 속에서 몸을 움직인 탓인지 대청소가 끝난 후 명훈은 낮잠이 들어 버렸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한참 동안 꿀잠을 자고 일어난 명훈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벌써 하늘도 어둑어둑해져서 어느새 밤 8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명훈은 자리에서 일어나 어슬렁어슬렁 거실로 나갔다. 상희와 미주가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명훈이 일어났니?”


상희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많이 피곤했나 봐요. 3시간을 넘게 잠을 잤다니까요.”


“그러게. 나도 이렇게 곤히 잠들 줄은 몰랐어.”


명훈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상우가 보이지 않는다.


“상우는 어디 갔어?”


“응, 좀 전에 친구 만나러 간다고 나갔어요. 참, 내 정신 좀 봐. 비 온다고 아까 빨래 걷는다는 걸 깜빡했네.”


“내가 걷어 줄게.”


명훈은 빨래 바구니를 들고는 마당으로 나갔다. 하늘을 쳐다보니 정말 금세라도 장대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고마워요. 오늘 밤늦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진대요.”


“그래? 비가 많이 오나 보구나.”


비라.. 앗!! 명훈의 머릿속에 갑자기 걱정거리가 생겼다. 어젯밤 밤밤언덕에 묻어두고 온 편지, 과연 비가 와도 젖지 않고 잘 있을까? 그러고 보니 종이박스 안에 담아 두었을 뿐 방수작업은 전혀 하지 않았다. 차라리 가방채로 묻어둘걸. 왜 그걸 옮겨 담았을까. 물론 그 편지를 다시 읽어볼 일이 있겠냐 싶지만 그래도 자신이 오랜 기간 공들여 써 내려간 기억들을 일순간에 잃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다시 찾아 읽지는 않더라도 어딘가에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어야만 마음이 안정될 것 같았다. 이런 바보. 그 흔한 비닐 하나 씌워두지 않았으니. 게다가 땅속 깊이 묻어둔 것이 아니라 비가 많이 오면 언제 휩쓸려 떠내려갈지 모를 일이다. 명훈은 창고 안을 두리번거렸다. 방수제로 사용할 만한 것이 뭐가 없을까? 그때 창고 한 켠에 작은 나무상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니스 칠이 되어 있어 충분히 방수 역할을 해줄 것 같았다. 쇠뿔도 단 김에 빼라고 했던가. 명훈은 이것저것 고민할 것 없이 바로 밤밤언덕에 오를 채비를 했다.


“당신, 어디 가는 거예요?"


미주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으.. 응. 그게 회사 동료들이 이 앞에 다들 모여 있다고 잠시 얼굴 좀 보자고 하네. 내일이 일요일이라서 그런가 봐.”


“그래요?”


미주는 미심쩍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웃으며 조심히 다녀오라며 우비를 건네주었다.


“절대 술은 마시면 안 되는 거 알고 있죠? 이따 비가 많이 온대요. 우산보다 이거, 우비 가져 가요. 전처럼 또 잃어버리지 말고.”


“응. 고마워. 술은 절대 안 마실 거야. 금방 다녀올게.”


명훈은 아내 몰래 숨겨둔 가방과 상자를 집어 들고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하루 만에, 그것도 이렇게 늦은 밤에 밤밤언덕을 다시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구나. 명훈은 얼마나 자신을 자책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10년간의 편지를 스스로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명훈은 플래시를 켜고 산길을 올랐다.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이지만 이 늦은 밤에 상자를 들고 산길을 오른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다. 별이 무수히 떨어질 것만 같은 맑은 하늘이었다면 분명 다를 텐데 당장이라도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라 그런지 명훈은 으스스하게 한기가 느껴졌다. 명훈은 조용히 자신이 즐겨 부르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잠시뿐일 거야. 곧 끝날 거야. 또 해가 뜰 거야. 갑자기 왔다 적시고 간다. 소나기. 소나기.’ 교도소에 있을 당시, 꼭 자신의 마음을 헤아려 줄 것만 같은 노래 가사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명훈은 매일매일 노래 가사를 머릿속에 되뇌이면서 내 인생도 곧 해가 뜰 것이라고 자신을 위로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졌다. 어이쿠. 역시 쏟아지는구만. 명훈은 아내가 건네준 우비를 꺼내어 얼른 입었다. 조금만 더 일찍 알아채고 빨리 나왔어야 했는데. 그랬다면 이 비를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최대한 편지가 덜 상하게 해야 한다. 좀 더 힘을 내자. 그런데 밤밤언덕을 코앞에 둔 그곳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분명 발자국 소리였다. 뭐지? 산짐승이라도 있는 건가? 명훈은 순간 겁이 났다. 명훈은 플래시를 끄고 재빨리 언덕 아래로 몸을 피했다. 소리의 정체는 사람이었다. 10대 소녀로 보이는 그녀는 흐느끼며 뛰어왔다. 잠시 후 또 다른 누군가가 재빨리 달려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들은 하필이면 바로 명훈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소희야. 미안해. 내가 이성을 잃었나 봐.”


빗소리에 섞여 자세히 들을 수는 없었지만 명훈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상우의 것이다. 상우가 왜 여기에? 비 오는 밤, 자신의 아들을 이곳에서 이런 모습으로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치 못했다. 깜짝 놀란 명훈은 눈앞에 서 있는 그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고 더욱더 몸을 움츠렸다.


“이거 놔. 놓으라고”


소희가 상우의 손을 뿌리쳤다. 그 순간 언덕 위의 토사가 급격하게 쓸려 나가면서 소희의 몸이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버렸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지만 명훈의 눈에는 누군가가 느린 화면을 재생하듯 너무도 천천히 시간이 흘렀다. 명훈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비명을 지르고 언덕 아래로 떨어지는 소희의 눈동자를.. 소희 역시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명훈의 눈을 응시하고 있었다. 죽어서도 잊지 못할 광경이다.


“소.. 소희야, 소희야 어디 있어?”


상우는 실성을 한 사람처럼 소희의 이름을 외쳤다. 명훈은 소희가 굴러떨어진 언덕 아래로 조심스레 이동했다. 어서 병원으로 옮겨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이 봐요. 학생. 학생, 내 말 들려요.”


명훈은 한참을 굴러떨어진 소희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조용히 흔들었다. 그러나 소희의 몸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 큰일이다. 빨리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명훈은 소희를 들쳐 업으려고 그녀의 몸을 바로 세웠다. 그런데 그녀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축 늘어져 버려 도저히 몸을 주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런 제길.. 명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불길한 예감이 명훈의 뇌리를 스쳤다. 서.. 설마. 명훈은 조심스레 그녀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대었다. 빗소리 때문이 아니다. 그녀의 심장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명훈은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약, 그녀가 죽은 것이라면 우리 상우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걸까? 지 얘비처럼 평생을 살인마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상우의 잘못이 아니라 사고사로 판명 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우리 마을의 경찰을 과대평가하는 처사다. 명훈은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10년 전 자신이 경찰에 붙잡혔을 때도 명훈은 본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울부짖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이 자신을 사지로 내몰았다. 그때 나는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고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했던가. 사랑하는 가족들의 믿음을 져버리고 얼마나 오랜 기간 스스로를 어둠 속에 가둬버려야 했던가. 명훈은 지옥 같았던 지난날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럴 수는 없다. 결단코 상우에게 그런 기억을 남겨 주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같은 불행한 삶을 되풀이하게 할 수는 없다.


“소희야, 어디 있어? 미안해. 내가 미안해. 제발 말 좀 해 줘.”


멀리서 상우의 울부짖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우의 울음소리를 듣고 나니 명훈의 결심은 더더욱 확고해졌다. 내 생각이 옳고 그른지 더 이상 판단할 시간이 없다.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한시라도 빨리 실행에 옮겨야만 한다. 명훈은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는 통에 어느새 상우가 이렇게나 가까이 자신 옆에 와 있다는 사실을 미쳐 알아채지 못했다. 한걸음 옆에 다가온 상우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린 명훈은 억지로 숨을 삼켜 버렸다. 상우에게 자신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그때,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우산 없이 살다가 아주 흠뻑 젖었네. 정신없이 살다가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어야지 소나기.’


명훈의 핸드폰 벨 소리다. 명훈은 화들짝 놀라 바지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황급히 꺼내어 이내 전원을 꺼 버렸다. 상우가 이 소릴 들었을까? 아니나 다를까. 무언가 인기척을 느낀 상우가 다시 한번 크게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거기 누구 있어요? 여기에요. 여기 사람이 다쳤어요. 도와주세요.”


명훈은 쥐 죽은 듯 조용히 몸을 웅크리고는 상우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기를, 상우가 어서 이곳을 떠나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토록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던 아들인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떻게든 그를 내 곁에서 떼어 놓고 싶었다. 피해자 가족이 나를 원망하더라도 모든 죄는 내가 달게 받겠노라 다짐했다. 모든 이들이 손가락질하더라도 그건 나 하나면 족하다. 하늘아, 내 아들 상우는 놓아 주고 나를 어서 데려가거라. 명훈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았다. 밤새 이 비가 그치지 않기를.. 그리고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가기를..    

  

새벽이 되자, 억수같이 내리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었다. 명훈은 밤밤언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으로 소희를 데려갔다. 이곳이라면 괜찮다. 자신 외에는 이 장소를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 쉽게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명훈은 가슴이 타들어갈 것만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하려는 것은 분명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명훈은 어떻게든 그녀를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묻어두자고 다짐했다. 그녀를 묻을 장소를 정한 명훈은 조심스레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 순간 소희의 몸에서 무언가 작은 물건이 떨어졌다. 명훈은 잠시 소희를 내려다 두고 떨어진 물건을 주워들었다. 핸드폰이었다. 명훈은 소희의 핸드폰이 자신이 상우에게 선물한 바로 그 핸드폰이란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최근에도 상우는 예전부터 사용하던 핸드폰을 쭉 가지고 다녔기에 내내 그 이유를 궁금해했었는데 이제 알 것 같았다. 그만큼 상우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었을테지. 명훈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그녀의 몸을 최대한 가지런하게 정리하여 조심스럽게 그녀를 보내 주었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해. 나를 용서하지 말거라. 그렇지만 우리 상우는 용서해다오. 상우의 죄는 내가 대신 받을 테니. 명훈은 어느덧 멀리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조용히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35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경찰이 찾아 헤매던 소희의 핸드폰은 밤밤언덕에 묻혀 있던 아버지의 편지와 함께 발견되었다. 아버지와 나에게 조금이라도 침착하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소희가 목숨을 잃던 그날 밤, 아버지는 나를 위해 절대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아버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당신이 밤밤언덕에 묻어둔 10년간의 편지를 증거물로 제출했다. 소희의 아버지에게 복수하기 위해 오랜 기간 계획범죄를 꿈꾸었다는 검찰의 주장을 반박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증거물이다. 오랜 법정싸움 끝에 아버지는 소희를 계획적으로 살해했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었다. 대신 사체유기죄가 적용되어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나 역시 소희의 죽음에 책임이 있기에 오랜 기간 재판을 받아야만 했다. 다행히 고의가 아닌 과실치사가 인정되어 집행유예를 선고받던 날, 엄마는 나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의 마음고생이 정말 심했을 것이다. 남편과 아들이 검찰에 기소되어 장시간 재판을 받았기에 엄마는 오롯이 혼자서만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더구나 마을 사람들의 갈 곳 잃은 매서운 눈초리는 온전히 엄마에게로만 향해 있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엄마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를 꼭 안아드리는 것 밖에 없지만.     


장 형사님은 나에게 여러모로 많은 힘이 되어 주셨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언제나 나를 믿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상우야, 사실, 나도 너처럼 내 실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보내야 했던 적이 있었어. 그래서 네가 낯설지 않게 느껴졌는지도 몰라. 너를 볼 때마다 가슴이 더 아팠거든. 나도 모르게 상우와 소희의 관계를 내 과거와 연관 지어서 생각했던 거야. 그런데 상우야. 그거 아니? 때로는 힘겹게 붙잡는 것보다 놓아주는 것이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거더라. 그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말이야. 이제는 너만 생각했으면 좋겠구나. 너를 위해서 보내줄 수 있어야 해. 소희도 그걸 원할 거야. 너에게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     

꿈을 꾸었다. 며칠째 반복되는 똑같은 꿈이다. 꿈속에서 나는 언제나 소희와 함께였다. 소희와 함께 여행을 가고, 바다를 보고, 서로를 껴안았다. 그리고 밤밤언덕에 올라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들을 함께 헤아렸다. 항상 그렇듯 소희는 밝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느덧 꿈속의 나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 꿈일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잠시 꿈속의 일상에서 한걸음 옆으로 벗어나 소희를 마주 보았다.


“소희야. 잘 지내니? 네가 있는 그곳은 어때?”


소희는 건강하게 잘 지낸다고, 자신이 생활하는 곳은 그 어디보다 예쁘고 멋진 곳이라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나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나? 나도 생각보다 지낼만해. 네가 떠난 직후에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겁도 많이 났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아.”


소희는 다행이라며 또다시 함박웃음을 지었다.


“소희야. 이제 나한테 찾아오지 않아도 돼. 나, 이제 네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하거든. 너도 이제 그만 나 같은 거 잊고 그곳에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어.”


소희는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웃고만 있다.


“고마워. 소희야. 나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 줘서.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소희 덕분에 나도 꿈이란 걸 꿀 수 있었거든. 소희와 함께 하는 동안 내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었어. 그리고.. 미안해. 나도 소희에게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이것이 끝일지도 모른다. 소희의 얼굴을 보는 것은 오늘이 정말 마지막일 것만 같았다. 이제 더 이상은 소희를 그리워하지 않을 생각이니까. 어느새 소희의 얼굴이 조금씩 희미해져 가고 있었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엄마와 나, 둘밖에 남지 않은 우리 가족은 하루하루를 아등바등 열심히 살아가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오랜 고민 끝에 내가 태어나서 평생을 살았던 이 집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할머니가 평생을 가꿔 오신 집, 우리 가족의 기쁘고 슬펐던 모든 추억이 깃들어 있는 집이지만 이제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엄마는 새로 일자리를 얻은 식당 근처에 조그마한 집을 얻었다. 방 2칸의 아담한 빌라였지만 욕실과 주방도 갖추고 있어 엄마와 나, 두 가족이 살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나도 짬짬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엄마에게 힘이 되고자 노력했다. 나는 전학 수속을 마치고 정들었던 친구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친구들은 나를 아무런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대해 주었다. 물론 소희를 죽게 만든 장본인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기에 나를 원망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그 역시 내가 받아들이고 감내해야 할 부분이다. 이삿짐을 트럭에 싣고 정든 집을 떠나던 날, 아침부터 나와 함께 했던 종수가 가까이 다가와 와락 나를 끌어안았다.


“잘 가. 상우야. 우리 자주 연락하고 자주 보는 거다. 알겠지?”


“그럼, 당연하지. 잘 있어. 종수야. 항상 내 옆에서 든든한 친구가 되어 줘서 정말 고마웠어.”


종수와 작별 인사를 나누는 순간에도 나는 알고 있었다. 종수는 언제나 변함없이 나의 소중한 친구일 것이라는걸.  

   

“상우야, 시간 다 됐다. 어서 가자.”


거실 밖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알겠어요.”


오늘은 아버지가 1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치고 출소를 하시는 날이다. 엄마와 나는 아버지를 마중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사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다시 아버지를 뵙게 된다는 사실이 낯설기만 하다. 아버지에게 어떤 말을 건네야 할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도 1년 6개월 전 아무런 감정 없이 아버지의 출소를 기다리던 그때와 비교하면 한결 마음이 가벼웠다. 아직 정확하게 감정을 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적잖은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면 당신이 쓴 편지에 적힌 대로 같이 무언가를 해 볼 생각이다. 함께 요리도 하고 운동도 하고 여행도 갈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했던 밤밤언덕을 같이 오를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올려다보았던 그 밤하늘의 풍경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싶다. 어느덧 시계는 아버지의 출소를 알리는 그 시각에 멈춰 섰다. 저만치 어디선가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 본 파란 하늘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느껴진다. 그 하늘 아래 내가 서 있다. 아버지도 같은 하늘 아래 서 계신다. 아버지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서른 걸음.. 스무 걸음.. 그래, 그거면 된 거야. 나는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이제 열 걸음 남았다. 나는 오늘.. 또다시 아버지를 만난다.     

이전 22화 밤밤언덕(22)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