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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루리 Sep 12. 2022

밤밤언덕(19)

28

“아저씨, 7시 넘었어요. 이제 그만하시고 집에 가셔야죠.”


태석이 명훈에게 시계를 가리켰다. 퇴근시간이 넘었는지도 모르고 작업에 열중하던 명훈은 그제야 기계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벌써 동료 작업자들은 퇴근 준비에 여념이 없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뵐게요.”


“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명훈은 같은 작업반 동료들에게 90도로 절을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명훈은 자주 찾는 제과점에 들렀다. 철야작업을 할 때면 늘 다녀 가는 곳이다. 아침에 보슬보슬 갓구워 낸 단팥빵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빵집 사장은 단골손님인 명훈을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 오늘부터 철야작업이신가 보네요.”


“네, 맞아요.”


명훈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단팥빵 10개 맞죠? 갓 구워낸 걸로 바로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빵집 사장은 조금이라도 덜 식으라고 포장박스 안에 고이 빵을 담아 주었다.


“감사합니다. 많이 파세요.”


명훈은 빵상자를 받아들고는 들뜬 마음에 얼른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평상시에는 걸어가는 길이지만 철야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버스를 탄다. 1분이라도 일찍 도착해 아직 식지 않은 따뜻한 빵을 상우에게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잘 먹었어요. 빵이 따뜻해서 참 맛있어요.’


명훈이 사 준 빵을 한 입 베어 물며 웃음짓던 상우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상우와 가까워지고 있음을 느낀다. 지난 10년간 상우에게 해 주지 못한 것들을 조금씩 갚아 나갈 생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소한 것들부터 하나씩 하나씩.


“명훈아, 어서 오너라. 오늘도 고생이 많았구나.”


아침잠이 없으신 명훈의 어머니는 집 앞 마당에 나와 반갑게 명훈을 맞이했다. 명훈은 얼른 빵 한 개를 꺼내어 어머니에게 건네주었다.


“엄마, 이거 드세요. 빵 사 왔어요.”


명훈이 품 안에 안고 온 탓인지 상자에서 꺼낸 빵에서 모락모락 김이 나고 있었다.


“안 그래도 단빹빵이 먹고 싶었는데 잘 되었구나. 얼른 들어가서 같이 먹자.”


“참, 상우는요? 아직 학교에 안 갔죠?”


마침, 교복을 입은 상우가 등교를 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아버지, 잘 다녀오셨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상우, 이제 학교 가는구나. 이거 단팥빵이야. 우유랑 같이 먹고 가.”


그런데 상우의 표정이 유난히 어두워 보인다. 오늘은 평소와 다르게 손사래를 쳤다.


“죄송해요. 아버지, 다녀와서 먹을게요. 배가 안 고파서요.”


“아, 그랬구나. 그럼, 내가 상우 꺼 남겨 놓을 테니까 꼭 다녀와서 먹어.”


“네. 감사합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명훈은 상우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상우의 뒷모습이 유독 힘이 없어 보인다.


“엄마, 상우한테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상희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쎄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새 통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어.”


“그래요? 무슨 일이지?”


명훈은 어깨가 축 늘어진 상우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본인이 더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얼른 들어가서 밥 먹자. 명훈아.”


명훈은 어머니를 모시고 힘없이 집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명훈의 일상은 순전히 가족들만 생각하는 하루하루로 채워지고 있었다. 이번 주에도 철야를 했지만 주말이 되지 마자 명훈은 일찍 잠에서 깨어 집안 곳곳을 보수하려고 마음먹었다. 지은지 수십 년이 지난 오래된 집이기에 집안 구석구석 보수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명훈은 읍내 철물점에 들러 각종 공구들을 둘러보았다. 10년 전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지만 교도소에서 나름 이것저것 어깨너머로 배운 덕에 이제는 어느 곳에 어떤 공구를 사용해서 수리를 해야 하는지 눈대중으로 대충 알 수가 있었다. 철물점에서 각종 공구를 사고 나오는 길에 저만치 낯익은 누군가의 뒷모습이 명훈의 눈에 들어왔다. 상우였다. 반가운 마음에 명훈은 상우를 부르려고 잰걸음을 걸었다. 그런데 앞서 걷던 상우가 경찰서 앞에 다다르자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망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인주군 경찰서. 명훈에게는 그 어느 곳보다 무시무시한 장소이다. 상우가 경찰서에는 무슨 일 때문에 찾아온 것일까? 명훈은 괜히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평범한 고등학생이 경찰서를 찾는다는 게 그리 흔한 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명훈은 한참 동안 경찰서 밖을 서성이며 상우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경찰서에서 나온 상우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경찰서 앞 길목에서 명훈은 상우에게 자신의 모습을 들키지 않으려고 급히 몸을 숨겼다. 또다시 상우의 뒷모습을 쳐다본다. 명훈은 계속해서 상우의 등 뒤만 바라봐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했다. 집에 돌아온 이후로도 명훈은 내내 상우 걱정에 아무런 일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더 이상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명훈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네? 누구시라고요?"


종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눈앞에 근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명훈이 서 있었다.


“아, 상우 아버지셨네요. 아저씨, 안녕하셨어요?”


“그래. 종수야. 오랜만이구나. 잘 지내지?”


“네, 그럼요. 아저씨도 건강하시죠? 그런데 어쩐 일이세요?”


“그게 말이다.”


명훈은 요즘 들어 상우의 어깨가 축 처져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조심스레 종수에게 물어보았다.


“우리 상우에게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사실은 오늘 상우가 경찰서에서 나오는 걸 봤거든. 내가 걱정이 돼서 말이야.”


명훈은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닌가 머리를 긁적이며 종수를 쳐다보았다.


“아.. 그랬군요. 그게 사실은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종수는 명훈에게 상우와 소희의 관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여자친구와 연락이 되지 않아 상우의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라고 말이다. 그랬구나. 상우에게 여자친구가 있었구나. 하긴,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가까이 지내는 친구가 있다는 정도는 이미 명훈도 알고 있었다. 한 번씩 늦은 밤에 상우가 누군가와 다정하게 통화하는 소리를 얼핏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아들이 실연을 당했다니. 바보같이 왜 그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그만큼 아들에 대해 하나하나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명훈은 아들과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절친한 부자지간이 되고 싶었다. 그래야 먼저 아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테니까.


“고맙다. 종수야. 그리고 오늘 내가 여기 찾아왔었다는 얘기는 상우에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네, 그럴게요. 저도.. 제가 소희 얘기를 아저씨께 했다는 거 상우가 모르면 좋겠거든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명훈은 상우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과연 뭐가 있을까 곰곰이 생각했다.


“여보, 혹시 상우가 좋아하는 게 뭔지 알아?”


잠자리에서 한참을 뒤척이던 명훈은 아내 역시 깨어있는 걸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네? 자다가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아니.. 그냥 아버지가 되어 가지고 아들이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야."


“글쎄요. 상우가 뭘 좋아하더라.”


한참을 생각하는 미주의 얼굴을 보면서 당신도 나만큼이나 상우에 대해 관심이 없었구나 책망을 하게 된다. 하긴, 나 역시 아들뿐 아니라 아내에게도 그만큼 관심을 쏟지 못했으니 할 말은 없다. 교도소안에서 무궁무진하게 계획했던 일들을 조금씩 실천해 나가려면 어떻게든 바뀌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겼다.


“음.. 그러고 보니 상우는 농구를 제일 좋아하는구나. 종수랑 항상 농구하러 다니는 모양이니까.”


맞아. 상우가 농구공을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을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명훈은 어제 사 온 공구를 가지고 무엇을 만들어야 할지 머릿속에 계획을 세웠다. 상우에게 선물할 농구 골대를 만들 테다. 마당이 그리 넓은 것은 아니지만 농구 골대 하나 정도는 충분히 세울 수 있을 것이다. 명훈은 당장 내일부터 상우에게 줄 멋들어진 선물을 만들겠노라 다짐을 했다.      


‘뚝딱뚝딱’ 못질을 하는 명훈은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내며 잠시 동안 굽었던 허리를 쭉 폈다.


“명훈아, 상우에게 선물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무리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회사에서도 힘들게 일하고 왔는데.”


명훈은 마룻바닥에 걸터앉아 걱정스레 자신을 쳐다보는 어머니에게 씩 웃어 보였다.


“걱정 마세요. 제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상우가 농구 골대를 보고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니 그깟 피곤함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있으면 상우가 집에 돌아올 시간이다. 깜짝 선물을 하려면 어떻게든 상우가 알지 못하게 해야 한다. 명훈은 고물상에서 얻어온 커다란 검은 비닐을 아직 형태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농구 골대 위에 살며시 덮어 놓았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명훈은 고개를 들어 대문 밖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지?”


누군가 낯선 사람들 몇몇이 집안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계십니까? 여기가 박상우 학생 집인가요?”


명훈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하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네, 그렇습니다만.. 누구시죠?”


“경찰입니다. 박상우 학생 아직 집에 오지 않았나요?”


경찰? 경찰이 우리 집에 왜? 명훈은 경찰들이 집에 찾아오는 광경을 또다시 마주하게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


“왜.. 왜 그러시죠? 우리 상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어떻게 소식을 듣고 왔는지 상당히 많은 수의 마을 사람들이 명훈의 집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명훈은 놀란 가슴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상우가 경찰에 붙잡혀 간 이후 명훈의 집은 그야말로 혼비백산이 되고 말았다. 우리 아들이 살해 용의자라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명훈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상우의 소식을 듣고 싶어 계속해서 경찰서를 찾아갔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뿐이었다. 우리 마을 군수의 딸이 실종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들어 잘 알고 있었다. 마을뿐 아니라 전국적으로도 대대적으로 보도된 뉴스라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게다가 그 일로 자신이 때아닌 의심을 받기도 했었으니까. 그런데 그 소희라는 얘가 상우의 여자친구였다니. 그건 정말 처음 듣는 얘기였다. 게다가 상우 때문에 소희가 죽었다는 소식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미주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자신의 아들이 그럴 리가 없다고 하소연을 했다.


“말도 안 돼. 우리 상우가 얼마나 착한 얜데. 그럴 리가 없잖아요. 당신도 알잖아. 우리 상우 절대 그럴 얘가 아니라는걸.”


명훈은 힘없이 쓰러지는 미주를 끌어안고는 힘겹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진수가 다급히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경찰서에 지인이 있어 상우 소식을 듣고 오는 참이다.


“명훈아, 그리고 제수씨. 제 말 잘 들으세요. 경찰에서는 상우가 소희를 죽인 범인이라고 생각하나 봐요. 그런데 아직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서 당장 기소가 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정말?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우리 상우.”


“그게 말이야. 지금 상우는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을 하는가 봐. 그래서 당장은 상우가 풀려나긴 하겠지만 경찰들은 그 여자애 시신이 발견될 때까지 어떻게든 상우를 붙잡아 둘 심산인가 봐. 너도 알지? 이거 워낙 매스컴에서 유명해진 사건이라서 쉽게 덮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 상황이 너무 안 좋아.”


뒤에서 상희의 한숨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명훈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대체 난 지금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상우에게만큼은 내가 겪었던 세상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곳이 어떤 세상인데.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범죄자라 낙인찍혀 살아갈 앞으로의 인생이었다. 살 날이 구만 리 같은 우리 아들을 이렇게 주저 앉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 아들에게 그런 미래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명훈은 마침내 마음을 굳혔다. 명훈은 한참을 뒤척이다 밤늦게 잠을 청한 어머니의 발밑에서 큰 절을 올렸다. ‘엄마, 나 다녀올게요. 이제 가면 또 언제 뵙게 될는지 알 수가 없네요. 이제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건강하세요.’ 명훈은 마음속으로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고했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운 명훈은 날이 밝자마자 상우가 있는 경찰서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했다.      


29

“누가 봐도 뻔한 것 아니냐고? 지 아비가 대신해서 죄를 덮어쓰려고 하는 거잖아. 이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벌려고 말이야. 지금 세상이 어느 땐데. 장형사 뭐라고 말 좀 해봐. 어떻게 생각해?”


동호가 재이를 쳐다보며 다그쳤다. 한참을 생각하던 재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지금으로선 박명훈 씨에게 혐의점이 없습니다. 그보다 시신을 찾는 게 우선이니까요. 이제 시간도 다 됐는데 어떡하실 생각이십니까?”


“기자들이 저렇게 들러붙어 있는데 어떡하긴 뭘 어떡해. 풀어 줘야지. 어휴, 도대체 시체를 어디다 묻었길래 이렇게 못 찾는 거야.”


동호는 잔뜩 화를 내며 문을 박차고 나가 버렸다. 재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명훈이 앉아 있는 취조실로 향했다. 재이가 방안으로 들어왔지만 명훈은 미동도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만 있었다.


“상우 아버님, 그만 일어나시죠. 아들 걱정을 하시는 아버님 뜻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지만 이건 아니잖아요. 상우와 함께 돌아가세요.”


“저기, 형사님. 우리 상우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명훈은 마침내 고개를 들어 재이에게 물었다.


“그건, 지금 당장 뭐라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만 아직은 상우가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그럼, 상우가 또다시 경찰서에 붙잡혀 올 수도 있다는 얘긴가요?”


재이는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약 새로운 단서가 드러난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현재로선 상우가 유력한 용의자인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명훈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또다시 말이 없다. 재이는 한참을 기다리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시간 다 되었네요.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상우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저.. 형사님.”


“네?”


재이는 가는 길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제가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뭘... 말씀하신다는 건가요?”


명훈은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신이 묻혀 있는 장소요. 그걸 말하면 제가 범인이라는 게 입증되는 거 아닌가요? 제가 한소희 학생을 죽이고 시신을 유기했습니다.”


재이는 자신이 무슨 얘기를 듣고 있는 건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충격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명훈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또박또박하고 명쾌했다.     


재이는 자신도 모르게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요즘 따라 담배 생각이 간절하다. 시끄럽게 움직이는 주변 사람들 틈에서 재이는 가만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동호가 재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뭐야? 너 다시 담배 피우는 거야? 여기 산속이야.”


동호의 질문에 흠칫 놀란 재이는 입에 물었던 담배를 부러뜨려 호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아니에요.”


“몇 년 동안 어렵게 끊은 걸 왜 또다시 피려고 그래. 그게 뭐 좋은 거라고. 너도 이제 건강 생각해야지. 나이가 몇인데. 안 그래?”


재이는 말없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어떻게 될 것 같아? 정말 박명훈 씨 말대로 여기서 한소희 시체가 나올까?”


재이는 슬쩍 고개를 돌려 먼 곳을 응시했다. 경찰 인력이 총동원되어 언덕 곳곳을 수색하는 광경이 재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지금 와서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하긴, 이런 곳에 묻었으면 우리가 그동안 못 찾은 것도 이해가 되네. 난 이 마을에 이런 장소가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어.”


재이는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보았다.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작은 언덕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 지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현지인이 아니라면 결코 발견하기 쉽지 않은 장소이다. 재이와 동호도 명훈이 말한 갈림길 입구를 찾는데 한참이나 얘를 먹었으니까. 그때, 멀리서 시끄러운 호각소리가 ‘삐익’ 울려 퍼졌다.


“여기입니다. 여기.”


깜짝 놀란 재이와 동호는 급히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달려갔다.


“뭐야? 찾은 거야?”


재이는 조심스레 경찰들의 시선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섰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누군가의 백골사체가 땅속 깊이 묻혀 있었다. 사체가 입고 있는 옷은 누가 봐도 10대 소녀가 편하게 입을 만한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다.


“정말이네. 정말 여기 있었어. 박명훈이 범인이라니..”


그런데 재이는 시신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지런히 양손을 모은 시신이 정면으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누군가가 일부러 가지런히 정리를 해 놓은 것처럼.     


어디서 소식을 듣고 온 것인지 경찰서 앞에 벌써부터 기자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옷을 잡아 끄는 기자들 때문에 재이는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기가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그들을 뿌리치고 강력반 안으로 들어온 재이는 급히 상우부터 찾았다.


“김 형사, 상우는? 상우는 지금 어디 있어?”


“아. 장 형사님. 안 그래도 기자들이 온통 정문을 지키고 있는 바람에 아직 귀가 조치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회의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아버지 소식을 모르고 있는데 어떻게 할까요?”


“잘했어.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재이는 급히 회의실로 들어갔다. 재이를 발견한 상우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 형사님.”


상우의 얼굴을 보니 왠지 모를 아련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몇 년 전 자신의 실수로 떠나보내야 했던 아내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왜 지금 그녀의 얼굴이 아른거리는지 알 수가 없다. 재이는 잠시 흐트러진 정신을 가다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상우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를 잘 들어야 한다. 알겠어? 혹시 어른들이 갈 만한 가까운 친척 집이 있니?”


“네?”


상우는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재이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마, 지금쯤 너희 집 앞에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야. 마을 사람들의 시선도 그럴 테고. 당분간은 몸을 피할 만한 곳을 찾는 것이 좋겠구나. 너희 가족들도 다 같이 말이야."


“아, 그렇군요. 치만..


상우는 고개를 숙였다. 재이는 상우에게 어떻게 아버지 소식을 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시간을 끌면 끌수록 상우에게도 좋을 것이 전혀 없다. 재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상우야. 사실은 좀 전에 소희 시신이 발견되었어.”


“네? 정말이에요? 그럼.. 정말 소희가..”


소희가 정말 죽었다니 상우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결국 자신이 그녀를 죽게 만든 것이다. 상우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그런데 더 중요한 얘기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잠시 뜸을 들인 재이는 상우에게 아버지의 자백으로 소희의 시신을 찾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자백이라고? 상우는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상우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어요. 우리 아버지가 왜요? 뭔가 잘못 알고 계신 거 아니에요?”


재이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쳐다보았다.


“미안하다. 지금 이럴 시간이 없어. 힘들겠지만 지금 너한텐 그럴 만한 여유가 없다. 앞으로 힘든 시간이 될 거야. 지금은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어떻게든 감당해야만 해.”


재이는 상우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상우의 팔을 붙잡고 밖으로 나갔다. 재이와 상우는 기자들의 시선을 피해 경찰 뒷문으로 몰래 몸을 숨겼다. 재이에게 이끌려 경찰서 밖으로 나온 상우는 집으로 향하는 도중에도 뭐가 뭔지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또다시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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