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우의 이야기 5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분주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살며시 문이 열린다.
"진우야, 엄마 왔어. 배고프지? 엄마가 빨리 밥 차려줄게."
밤늦게 집에 돌아온 엄마는 변함없이 내 저녁식사를 먼저 챙겼다. 당신이 힘든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나는 문이 닫힐세라 급히 엄마를 향해 외쳤다.
"엄마!"
"응?"
뒤돌아보는 엄마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루종일 당신이 돌아오면 달라진 나의 마음을 표현하겠노라 다짐했건만 막상 그 때가 되니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왜 그래? 진우야. 어디 몸이 안 좋은 거야?"
엄마는 당신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겠다는 듯 당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엄마, 나 이제 잘할게요. 살고 싶어졌어요. 정말이에요. 더 이상 나를 포기하지 않을 거에요.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겼거든요. 예전처럼 다시 꿈을 꾸고 싶은데.. 그럴 수 있겠죠?"
평상시에는 결코 할 수 없는, 입밖으로 내 본적도 없는 말이다. 살며시 내 팔을 만지고 있던 당신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울지 말아요. 나는 들리지도 않는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엄마가 그만 울었으면 좋겠다. 그게 기쁨의 눈물일지라도.. 내가 다시 희망을 갖는다면 나보다 더 좋아할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물론 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이 그렇겠지만 우리 엄마는 그 정도가 남다르다고 믿었다. 내 몸과 마음이 송두리째 망가져 버리고 나니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만약 엄마가 내 곁에 없었다면 나는 결코 마음을 돌이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물론이지. 우리 진우는 뭐든지 해 낼 수 있을 거야."
진우의 이야기 6
엄마와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나는 사고가 일어난 이후 처음으로 내 방을 벗어나 주방에서 식사를 했다. 그것도 엄마와 함께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눈으로는 당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마음으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선명하게 엄마의 모습이 그려질 것만 같다. 1년만에 처음으로 함께 하는 모자지간의 애틋한 식사시간이 끝난 후 엄마는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안아주셨다.
"우리 진우, 마음을 달리 먹었다고 하니 나도 너무 기뻐. 이제 약도 잘 먹고 건강해지자."
엄마는 지난 몇개월간 끊었던 알약을 다시 꺼내 놓았다. 의사선생님은 내가 조현병을 크게 앓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래서 항정신병 약물을 오랜 기간 처방받았다. 그러나 나는 내 마음을 더욱 어지럽게 한 것이 오히려 그 약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몸이 망가졌다고 해서 마음까지 망가진 것은 아닌데. 내가 삶을 포기했던 것은 예전과 같지 않은 내 몸상태를 아쉬워했기 때문이지 결코 내 정신이 온전치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엄마.. 약은 그만 먹을래요. 나 이제 약에 의존할만큼 나약하지 않아요."
잠시 대화의 공백이 생겼다. 엄마는 내 마음이 다치지 않게 당신이 원하는 바를 권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참만에 입을 연 엄마는 어떻게든 내가 약을 복용하길 바랐다.
"그렇지만 의사선생님은 아직 이르다고 판단하시는 걸. 엄마는 진우가 너무 성급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번에 처방받은 약까지는 먹으면 안 될까. 의사선생님도 신신당부를 하셨거든."
나는 손에 쥐어진 알약을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응시했다. 정말 이 약을 먹으면 내가 더 건강해지는 걸까? 여전한 마음속의 의심은 꼭 맞잡은 엄마의 손길을 통해 누그러졌다.
"네, 알겠어요. 엄마가 원하신다면.. 먹을게요."
진우의 이야기 7
점점 정신이 몽롱해진다. 차분히 가라앉은 내 머리는 어느새 무력한 그때의 나로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어김없이 꿈을 꾼다. 온갖 형용할 수 없는 갖가지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휘젖는다. 나는 온전한 몸을 가졌지만 지난 1년간 함께 하지 못했던 친구들은 모두 불구의 몸이 되어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꿈이란 게 그런 것 아니던가. 전혀 설명할 수 없는 머릿속 망상들이 활개를 치는 곳. 나는 오늘도 그 세계에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한다.
진우의 이야기 8
흐릿한 정신상태와 달리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내가 무언가를 다시 하기 위해서 나는 사회로 나가야만 한다. 집안에 틀어박혀 허송세월을 보낼 수는 없다. 남들의 시선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든 밖으로 나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만 한다. 친구 몇몇의 이름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정훈이, 명수.. 그들이라면 나를 도와줄 것이다.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내가 어떤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지 그들은 알고 있을까? 왜 나를 한번도 찾지 않았을까. 한번쯤은 병문안을 올 법도 한데. 지난 밤 엄마는 내게 핸드폰을 건네 주시며 말했다.
"진우야, 여기 새 핸드폰이야. 엄마 명의로 개통을 했어. 친구들 전화번호는 복구를 하지 못했어. 미안해."
나는 낯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어렴풋한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차례차례 눌러 보았다. 아쉽게도 전혀 연락이 닿지 않았다. 애초에 전화번호를 기억해 낼 수가 없으니까. 친구들도 고등학생이 된 이후 그 생활에 익숙해지느라 이미 나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야속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고맙게도 엄마는 당신이 나서서 친구들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보겠다고 했다. 오랜 기간 잠들어 있던 내 핸드폰을 복구해서라도 말이다.
진우의 이야기 9
애석하지만 마음을 고쳐 먹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내 일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약에 취해 정신이 온전치 못한 하루를 보내고 나면 어느새 밤이 찾아온다. 남들이 느끼는 게 어느 정도일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약을 먹은 날과 아닌 날의 차이가 극명하게 나뉘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는 엄마 몰래 약을 숨기기 시작했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더 이상 약물에 의존하지 않을 테다. 내가 달라진 모습을 보인다면 엄마도 분명 내 의견을 존중해 줄 것이다.
진우의 이야기 10
오랜만에 정신이 맑은 하루다. 오늘은 이전과 다르게 활기찬 몸상태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힘들기만 했던 휠체어도 오늘따라 한 몸이 된 듯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항상 맛있는 아침밥을 차려주는 엄마의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다. 오늘의 식단은 무얼까? 책상에 앉아 숟가락을 집어 드는 그 때, 미세하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엄마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지? 새벽에 집을 나섰을 텐데. 그런데 엄마는 누군가와 함께였다. 내가 사고가 난 이후로 엄마가 누군가를 집에 데려오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왜 여기까지 들어 오는 거야? 나 빨리 나가야 해."
목소리가 희미해 잘 들리지 않았지만 엄마는 누군가와 실갱이를 벌이고 있는 듯 했다. 분주한 발소리를 마지막으로 문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다시 나가 버린 걸까? 휠체어를 밀어 책상앞에서 벗어나려는 그 순간 이번에는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너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거야. 이게 정말 진우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를 위한 일? 여자는 격앙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야. 들리겠어."
이번에는 좀 더 작게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문앞에 가까이 다가가 살며시 귀를 귀울였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 엄마를 불러 보았다.
"엄마, 엄마에요?"
역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시 집을 나가신게 분명하다.
그날 밤 나는 낯선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그건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를 위한 일? 그게 대체 무엇일까? 한참이나 고민을 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그 날밤 한숨도 잠을 청하지 못한 채 내 머리는 온전히 그 생각만으로 잠식되어 버렸다. 그렇게 호기심은 단 하루를 참지 못하고 이튿날 봇물을 터뜨렸다. 나는 무신경한 듯 어제 들었던 낯선 여자의 이야기를 꺼내었다.
"엄마, 근데 어제 같이 오신 분은 누구에요?"
"으.. 응? 무슨 말이니?"
나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엄마는 필시 당황하고 있다. 지난 1년간 단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이질적인 감정이다.
"어제 오전에 집에 다녀가신 거 아녜요? 누구랑 같이 온 거 같았는데."
엄마는 대답 대신 무언가를 분주히 정리하셨다. 이러저리 산만한 발소리만 정처없이 들려 온다. 그리곤 잠시 침묵이 흐른다. 엄마는 분명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괜찮아요. 말하고 싶지 않으시면.."
"응. 들었구나. 난 진우가 잠들어 있는 줄 알았어. 미안해."
"아.. 아니에요."
아차.. 지난 며칠간 엄마가 주신 약을 계속해서 복용했더라면 내 머리는 그 시간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을 것이다. 순간 내가 약을 몰래 버렸다는 사실을 엄마가 알아차릴까 봐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엄마의 정신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해 있는 듯 했으니까.
"이모였어. 갑자기 보고 싶다고 찾아 왔었거든. 혹시 무슨 소리를 들은 거니?"
"아뇨. 엄마가 누구랑 같이 온 거 같아서 나가 봤는데 이미 안 계시더라구요."
"그..그랬구나."
당황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어느새 안도섞인 한숨으로 바뀌어 있었다.
"피곤한데 오늘은 일찍 자야겠구나. 진우도 푹 자렴."
방안에 돌아와 한참이나 고민했다. 당황한 엄마의 목소리도 마음에 걸렸지만 그보다 엄마가 말하는 이모란 사람이 누구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모? 그게 대체 누구지? 엄마에겐 형제자매가 없다. 나는 그동안 엄마가 내게 이모라고 소개시켜 준 사람이 누가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좀체 기억이 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