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살 크리스마스이브를 앞둔 주였다. 코스트코를 갔고 사람들에 꽉 차 밀려가는 지경이었는데 계산대 앞에서는 절정을 이뤘다.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더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살면서 처음이었는데 숨이 잘 안 쉬어졌고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다. 쓰러지지 않으려 카트기를 꼭 잡고 사색이 되어갔다. 계산대를 나오자마자 일행에게 나가봐야겠다며 말하곤 밖으로 도망치듯 나와 어딘가에 걸터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단순히 답답하다 힘들다가 아니었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때때로 수업을 할 때도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트나 백화점 폐쇄적인 공간과 식당에서도 나타났다. 그러다 요가원을 하고 있는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본인도 그런 경험을 했다고 했다. 앞에 앉은 사람들의 눈이 개미처럼 보이고 수많은 개미들이 보이며 숨이 막힌다는 얘기였는데 이야기의 끝에 공황증세가 그렇다는 말을 전했다.
그 시기 요가원이 점차 무거워지던 때였다. 너무 많은 운영비로 돌아가던 요가원을 인수한 게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개선하기에는 여전히 두려움이 컸었다. 하나씩 하나씩 바꾸면 되는 것이었는데 그땐 그렇게 해야만 하는 줄 알고 바보처럼 무거운 짐을 지고 가고 있었다. 그러던 즈음에 나에게 그런 증세가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다 어떤 소리를 들었다. 청아하고 평안해지는 소리였다. 그 소리의 출처가 싱잉볼이라는 것을 알고 서울에 싱잉볼을 가르쳐주고 들려주는 곳이 있다고 해서 단번에 달려갔다. 가만히 누워 듣고 있는데 그제야 마음이 조금 놓였다. 그리고 그날 대구로 오는 길 싱잉볼들을 사가지고 기차를 탔다. 느리게 울리는 진동들이 나에게 괜찮다라고 얘기해 주는 것 같았다. 너무 많은 사람과 일과 돈과 사건들을 상대하느라 지쳐버린 나에게 위로가 되는 건 아주 고요한 울림들이었다. 어린 나이에 미혼인 상태로 큰 요가원을 운영하느라 되려 더 괜찮은 척 강한척했던 것이 독이 되어 몸속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선물처럼 나에게 공황이 온 것이다.
지금은 싱잉볼이 어느 요가원에 가도 보이지만 그때는 아주 생소한 때라서 요가원에서 두드리고 있노라면 요강이냐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강하고 빠르고 정형화된 요가프로그램이 주를 이루고 있어서 느리고 섬세한 무언가가 주는 자극은 밀려나기 쉬웠다. 때와 장소가 맞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싱잉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요가원과 나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크게 운영했던 그곳의 아이덴티티와 내가 추구하는 가치 사이에 균열이 가시화되기 작했다.
덕분에 이 시기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특강을 하게 되었는데 요가와 아로마테라피, 싱잉볼과 명상을 풀어내기에는 특강이 더욱 적절했다. 그렇게 싱잉볼과 요가를 함께 하면서 나만의 속도와 스타일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내가 느끼는 행복한 지점을 타협하고 싶지 않아 졌다. 그랬다. 더 이상 타인의 관점에 나를 맞추고 싶지 않아 졌다. 세련된 시설과 화려한 간판이 거추장스러워졌다. 요가를 할 때나 생활을 할 때 친구랑 밥을 먹을 때나 티칭을 할 때도 다르지 않았으면 했다. 요가가 삶과 분리되지 않았으면 했고 일상의 연속성안에 나란히 놓였으면 했다. 밥 먹을 때 긴장하지 않는 것처럼.
물론 잘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출발한 것이겠지만 어느샌가부터 애를 쓰며 살고 있었다. 요가도 그랬다. 거기에다 비교대상이 들어오는 순간부터는 앞서가려고 버둥거리다 제풀에 지쳐 쓰러져버렸다. 무엇을 위한 승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가 공황증세까지 나타난 게 아닌가 혼자서 생각해 본다. 모든게 사라지고 매트하나만 남았을 때 그것만으로 충분하구나 하고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수련을 리드할 때 내 앞에 온 사람들을 보며 마치 수많은 나를 마주하는 것 같다는 생각으로 마주하는데, 어느날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물었다.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서갈 때 마음이 흔들려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때 전한 말이다. 모두에게 신성의 축복이 가득하기를!
생은 스스로와 함께 사는 시간들입니다.
스스로가 사랑스럽고 스스로와 잘 지내는 게 더 소중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