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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수민 Jul 08. 2023

매트 갈이

 가족이랑 살다가 자립이 하고 싶어 어거지로 나갔다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물론 전의를 다지듯 다시 준비해서 온전히 자립할 수 있었다. 꽤나 신기한 형태였는데 마침 기존의 요가원을 정리한 시점에 작은 공간에서 놀아야겠다 싶었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그동안 너무 오래 일했으니 입에 풀칠만 하자는 심정이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인데 부모님은 혹여나 내가 잘못된 생각을 하게 될까 봐 노심초사였다고 한다. 코로나가 터지고 한 달 남짓 후 요가원을 철거하고 탈탈 털고 나왔으니 저 애가 상실감이 얼마나 클까 싶으셨던 것 같다. 그때의 난 100에서 0이 되었지만 정말로 후련했다. 시바가 칼춤을 추고 난 자리에서 보는 지난날의 먼지가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큰 요가원을 정리하면서 강제 미니멀리스트가 된 나는 10평이 된 공간에서 요가를 하고 먹고 잤다. 소박하고 아름다운 동네를 산책하고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보고 다리를 건너가 부모님과 식사를 하기도 하고 밤이 되면 지인들이 모여 술 한잔에 이러쿵저러쿵 남들도 하는 사는 얘기를 나도 하며 일출도 일몰도 보며 살게 되었다.


 십여년 만에 처음이었다. 제대로된 식사를 일상적으로 하고 일몰을 보며 수업을 하는 것이. 그것만으로 행복했다. 나는 종종 수업이 없는 날이나 주말엔 햇볕을 따라가며 걸었는데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얘기하지 않았던 혼자만의 비밀이다. 누가 들으면 이상할 듯 한 이야기니까. 지금도 가만히 서서 햇볕을 받고 있는 나를 보면 신랑은 “누가 보면 이상하게 볼 거야”라고 한다. 핫요가원의 특성상 거의 사방이 막힌 곳에서 10여년이 넘게 수업을 했으니 정확히 역행의 요가였고 열심히 하면 할수록 힘들어지는 삶이었다. 물론 그것도 나의 지극한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요가원 운영 말미에 통창을 내고서야 알게 되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동한 작은 요가원에서의 2년은 하루도 빈틈없이 의미 있는 날들이었다. 소소한 행복들이 켜켜이 쌓이는 즐거움이 이것이구나! 싶었다. 날 선 마음이 놓이기 시작했다. 마음이 편하니 활기가 돌았고 저절로 사람들이 다시금 모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다정한 이들로. 그리고 이번엔 할 수 있는 정도로 그리고  하고 싶은 정도로 조율하며 나아갔다. 또다시 소진되어서는 곤란하니까. 그리고 화려하고 거창한 건 재미가 없어졌다.


 요가원에서는 곧잘 어떤 요가스타일을 프로그램으로 제시한다. 그렇지만 요가네를 운영할 땐 그날 오는 이들에게 전하고 싶은 스타일로 툴들을 꺼내어 썼다. 하면 할수록 신이 났다. 물론 피곤한 날들도 있었지만 다람쥐가 도토리를 줍는 하루처럼 일상이 갖추어지기 시작했다.

 여유가 생기니 지금의 신랑을 만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인생의 다음단계로 나아가는 경험을 하고 있다. 다이내믹한 30대의 요가원 운영은 삶이 내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들의 총체였다. 정확히 10년을 운영하고 8년은 아주 크게 2년은 아주 작게 운영하며 부모님 말대로라면 돈주고도 못 할 경험을 했다. 물론 돈을 벌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나만 아는 치열한 내 삶을 목격했고 마음 한켠에 비장의 무기처럼 스스로를 믿는 힘이 되었다. 머리로 아는 건 똑똑하다 하지만 몸으로도 아는 사람의 이야기엔 눅진한 피땀이 묻어있어 어쩐지 궁금해지는 것처럼 나는 나를 지지하게 되었다.


 

 사회의 트렌드 또한 보이는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영역으로 확장되고 있었고 코로나를 맞아 치유의 무언가가 필요했던 것 같다. 나도 그랬나보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에 드디어 멈춰 섰고 외부를 바로 보며 함께 발맞추어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사주명리를 공부하며 나와 외부가 엇나갈 때 나도 힘들고 외부도 나를 힘들어하는구나 싶어서 나를 고치거나 바로 보는 힘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 시점이기도 했다.


 그렇게 돌고 돌아 본질로 오게 되었다. 물론 지금도 헛디디고 여기가 어디지 할 때가 있지만 헛된 것들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진 듯하다.




 34살 발리에 갔을 때 그 유명한 요가반을 본 순간 발이 붙어버렸다. 한참을 논두렁 같은 길의 어느 지점에서 수련하는 곳을 지켜봤다. 나무로 지은 사방이 뚫린 한국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공간에서 모기가 붙지 못하게 하느라 칙칙이를 뿌리고 질퍽질퍽한 길을 걸어 다녔다. 그곳사람들의 표정이 참 편안해 보였다. 때때로 발리라는 여행이 그리고 요기들의 메카인 우붓이라는 곳의 설렘이 주는 상기된 표정들도 어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부터 첫번째 운영했던 요가원을 언젠가 폭파하겠다고 내심 마음먹긴했지만 훗날 정말 그런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다.

 요가원 운영은 수련이라는 특성과 사업체 운영이라는 상충되어 보이는 부분들이 있기에 보다 더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던것 같다. 그리고 많은 수업료를 지불한 후에야 현실은 영적성장의 지표임을 명확히 새길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출산과 육아가 이어지며 서울에서 요가원을 운영하는 건 현실적으로 시일이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든 요가랑 살고 싶었고 지금은 글이라는 매트위에 서있다. 브라만에서 비슈누로 그리고 시바로 순환되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samasthiti! 글 위에서 수련을 다시 시작하겠다 생각하니 처음 매트위에 선 그날처럼 마음이 두렵기도 설레기도 한다.  발리에서 만났던 운전기사이자 요기였던 그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며 써보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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