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자의 일상 철학 084
1.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쓰자. 뭐라도 쓰자. 이 기분이라면 뭐라도 쓸 수 있겠다.’
오늘 아침 기분이 좋습니다. 어제 내 글을 읽은 한 독자가 감동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글을 썼는데, 그 글이 누군가에게 위안이고 위로였다 합니다. 어제 기분 그대로라면 뭐라도 하나 되겠다 싶은 것이 대박 기운이 넘칩니다. 집안일을 끝내고 바로 책상에 앉았습니다. 노트북을 켰습니다. 새로운 꼭지 하나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뭐를 작정한 것도 계획한 것도 없이 그냥 뭐 하나 써보고 싶은 날입니다.
2.
며칠 전 보았던 드라마에서 이번 준비 중인 책과 어울리는 소재가 있어서 원고 하나를 더 보태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쓰기로 했습니다. 재미있게 본 드라마인데 드라마 리뷰보다는 최근 내 생활에 바꾸었으면 하는 문장이 있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첫 문장부터 어렵지 않게 써집니다. 말 그대로 술술 써집니다. A4 용지 두어 장을 금세 채웁니다. 보통 초고를 쓰는 동안 문단 별로 다시 읽기를 하면서 바로바로 수정을 합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완성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쓴 원고는 며칠. 몇 달, 때로는 한 계절이 지나도록 덮어 둡니다. 비바람 모진 고생을 하진 않지만 시간을 두고 내버려 둡니다. 모든 것에는 시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숙성된 고기가 맛있고 성숙한 사람에게서 매력이 있듯이, 글에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쓴 글을 바로 읽으면 크게 고칠 부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한 달 뒤에 다시 펼쳐보면 맞춤법, 문맥 여기저기 고칠 부분이 보입니다. 한두 개가 아니지요. 시간을 두고 틈을 주어 다시 보면 부족한 것이, 수정할 것이 보입니다.
드라마와 내 책을 연결할 때, 오늘 쓴 원고는 전체 내용과 어울리는 것이었습니다. 내 생활이 문맥에 들어가기 딱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자료를 찾거나 인터뷰하는 단계는 없습니다. 나를 관찰하고, 안을 들여다보면 되는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이니 술술 써집니다.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잠잘 때까지 하루를 잘 들여다보고 관찰하여 썼으니 자연스럽습니다.
3.
아,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렇게 술술 써진 글이 다시 읽어보니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어제 감동의 도가니를 맛본 작가가 쓴 글 맞아? 되물으며 원고를 뚫어질 듯 바라봅니다. 문제는 뭐를 고쳐야 할지,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아주 난감합니다. 이제 쓰던 글의 저장 버튼을 누르고 노트북 전원을 끕니다. 더는 쓰지 말라는 신호입니다.
블록을 쌓는 것도, 퍼즐을 맞추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풀리지 않을 때는 억지로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단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일을 합니다. 어제 기분이 오늘 기분일 수 없고, 어제 받은 칭찬이 영원할 수 없습니다. 어제 성공과 칭찬은 어제에서 끝난 겁니다.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글을 씁니다. 우쭐했던 기분을 내려놓고, 들뜬 마음을 가라앉힙니다.
4.
글을 쓴다는 것은 인생살이와 똑같습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고, 완성도 없습니다. 비록 알 수 없는 미래를 앞에 두었지만 어쩌면 그 끝을 알 수 없어서, 완벽한 끝이 없어서 시작하는 겁니다. 마지막이 있다면 정해진 결과가 있다면 재미없습니다. 알 수 없어서 가보는 겁니다. 내가 지금 쓴 글이 완벽하다면, 완성된 것이라면, 다시는 펜을 잡을 수 없겠지요. 다시 펜을 잡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알 수 없음!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런 건가 봅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이 있던데 글은 고쳐 쓸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글은 그렇게 수시로 고쳐 쓰는 겁니다. 글은 쓰고 수정하고 쓰고 수정하고 끝없이 쓰고 끝없이 수정하는 것입니다. 완성이 아니라 더 나아지기 위해서 말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 내일 또 쓰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펼쳐서 수정하고 또 덮어 두고 말이지요. 내일은 지난번에 써두었던 숙성된 글 하나를 꺼내 또 수정하고, 또 기분이 나면 새로 하나를 쓰겠습니다. 나는 쓰는 동안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써봐야 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