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자의 일상 철학 089
1.
아침에 현관문을 닫고 나오면서 손에 쥔 가방 하나를 바닥에 놓쳤습니다. 가방 안에 있던 책 한 권이 툭 튀어나왔고 펼쳐진 페이지에 "모멘트 모리" 글자가 눈에 박힙니다. 얼른 책을 집어 가방에 넣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갑니다. 이렇게 바쁜 아침에 하필이면 모멘트 모리, 라니.
2.
운전대에 앉으며 보조석을 보았습니다. 가방만 다섯 개. 유치원 현관 앞에 줄지어 세워 둔 가방들처럼, 옹기종기 모인 가방은 제각각 나갈 순서를 기다립니다. 좀 전에 펼쳐진 책을 다시 가져와 페이지를 엽니다. 두 단어가 오늘 내내 생각 좀 해보자 합니다.
Moment Mori.
운동을 열심히 할지는 모르겠지만 사우나는 갈 것입니다. 5월 합창제와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해 합창 연습을 해야 합니다. 올해 서원을 담은 월요 경전 기도가 끝나면 공양간에 들러서 점심 공양(물론 때를 놓치면 굶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하고 출근합니다. 학원에서 오후 수업이 끝내고 사무실에 남아서 책을 조금 읽고 원고 하나를 쓸 예정입니다. 혹시 여유가 된다면 지난주부터 아껴두었던 영화 한 편을 보고 퇴근하고 싶습니다. 영화까지는 좀 무리겠지요.
오늘 일과 중에서 학원 수업은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이고, 나머지는 살기 위해 하는 일입니다. 값지게 살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내가 하는 일은 대체로 즐겁습니다. 그래서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급제동이 걸린 겁니다. 먹고사는 것도, 열심히 사는 것도, 값진 인생도 다 좋습니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사는 걸까요? 이 예쁜 날에 나는 꽃구경 단풍놀이 한 번 못 가고 지금 뭐 하는 걸까요?
3.
이맘때면 목련을 보러 일부러 운전해서 밥 먹으러 가던 목련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올해는 가지 못했습니다. 점심 한 끼 먹으러 가는 것도 무르고,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걸어서 30분이면 족할 카이스트 벚꽃 구경도 놓쳤습니다. 그렇게 나는 한 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그 시간을 버리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순간도 즐기지 못하고 있는지. 큰 한숨 소리로 나를 달래며 핸드폰으로 방구석 꽃구경이나 하자고 핸드폰을 꺼냈습니다.
톡이 왔습니다. 최근 알게 된 지인이 에세이집 낸다는 소식에 잘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 안부를 물었습니다. 지인 프로필 문구를 보니 아하, 오늘 이 두 단어가 저녁까지 나를 붙들어두었습니다.
Mmoment, Mori~~~^^
예상보다 출간이 한두 주 빨라져서 지난주 내내 최종 원고 수정과 피드백을 주고받느라 바빴습니다. 막상 수정하는 데는 이틀 정도만 걸렸으니, 남은 5일은 몸이 아니고 마음이 급했습니다. 일하느라 바빴던 것이 아니고 생각과 걱정이 앞서서 여유가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새로운 일, 새 책 출간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잠깐 꽃 보러 산책도 마다하고, 친구랑 마시는 커피에서도 맛을 놓치고 말았던 겁니다. 평소 하던 독서와 글쓰기, 합창과 운동도 대충 해버린 한 주였습니다.
4.
나는 왜 책을 내려고 했을까요? 지금 하는 일에서 덜 경쟁적이려고, 마음에 여유를 가지려고, 그래서 자유로운 유목민이 되겠다고, 작가가 되기로 했는데, 어째 더 바빠지고 여유 없는 날을 보내고 있는 걸까요? 이러려고 글 쓰고 책 내려는 게 아닌데 말이지요.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면 병이 날 성격입니다. 그러니 하던 일을 그대로 하고, 책을 낸 작가로서 할 일은 해야 하니 앞으로 더더 바빠질 것은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해 오던 일에 소홀하지 않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신경 써야겠습니다. 새로운 일과 지금까지 하던 일 사이에 균형을 지키며 잘 나의 하루와 잘 지내겠습니다.
KEEP MY DAY BALANE.
MOMENT MO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