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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Sep 15. 2023

서론이 너무 깁니다. 힘 빼고 가볍게 툭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77

1.

“그래도 네 인생 남과 다른 뭔가가 있을 것 아냐?”


사는 게 어떠냐는 친구 질문에 인생 뭐 있나?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인생 아니겠냐, 시니컬한 답을 주었더니 다시 묻습니다. 다시 돌아온 질문에 다른 답을 해주려고 잠깐 생각하니 별거 없던 인생에 사족이 붙습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 누구와 누구의 몇째로 유년기 청소년기를 거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잘 다니나 싶더니 슬픈 가족사의 주인공이 되어 방황도 해보고, 결혼에 욕망 없던 내가 아들딸 낳고 살고 있으니. 주저리주저리 묻지 않았으면 섭섭할 뻔했습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내 인생 초반은 어찌어찌 태어나 그냥 그냥 살았습니다. 나에게 행복이란 동화나 교과서에 나오는 실재하지 않는 단어인 줄 알았습니다. 불행과 불운이라는 외줄 타기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니 할 말이 오죽 많았을까요? 중년이라고 별일 있었겠나 싶은데 또 돌아보니 대충 훑어도 장편 소설이요 드라마 16부작은 족히 될 것 같습니다. 오지 않을 장밋빛 인생이 잠깐 스쳐지나 가는가 싶더니 인생 중반을 훌쩍 지나고 후반기를 향합니다. 


2.

“옛날 얘기 말고, 지금! 지금 네 인생이 어떻냐고?”


지금을 묻는데 나는 또 옛날이야기나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렇습니다. 반백 살을 산 것이 자랑인 양 나 혼자 세상일 죄다 겪은 사람처럼, 혼자 힘들고 억울한 시기를 보낸 희생양처럼, 지난 시간 속에서 혼자 그렇게 허우적거리며 나올 생각을 못합니다. 지금을 물어보면 지금을 대답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만 과거로 돌아가 그때만 말합니다.


인생이 나이 따라 흐르는 게 맞긴 한가 봅니다. 인생 초반은 할 말이 넘쳐납니다. 중반에는 뭐 하는지 그냥 빨리 지나갑니다. 후반에는 어쨌든 마무리는 해야 하니 후딱 지나갑니다. 시간은 나이 따라 속도를 낸다 합니다. 십, 이십 대는 시간이 그리도 안 가더니 삼, 사십 대는 하는 일 없이 시간만 갑니다. 오십 이후는 시침이 분침처럼 또 육십칠십에는 분침이 초침처럼 빨라지겠지요.



3.

글을 쓰다 보면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눕니다. 글을 10으로 보면 서론 결론이 각각 2, 본론이 6 정도면 참 좋겠습니다. 서론은 이제 내가 이야기를 좀 시작할 테니 봐라! 알려줍니다. 결론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렇다! 하는 것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내 글은 내 인생사를 다루듯 서론이 너무 깁니다. 서론이 5는 되는 것 같습니다. 너무 길다 싶어 급하게 본론으로 넘어가서는 4를 차지합니다. 이젠 다급한 마음에 마무리한다며 결론은 1이 될까 싶을 정도로 후딱 끝냅니다. 처음 쓴 초고를 다시 읽어보면 내가 쓴 글인데도 하고 싶은 얘기가 뭔데? 언제 나오려나 본론? 하는 표정이 나도 읽힙니다. 그리고 혼잣말을 합니다.



4.

“서론이 너무 길어”

그렇습니다. 삶도 일상도 글도 나는 매한가지였습니다. 나는 초반에, 초반부터 힘을 빼는 사람이었습니다. 쓰기 싫다! 뭐 쓰지? 하다가도 막상 노트북을 켜면 무슨 할 말이 그리도 많은지 열심히 씁니다. 뭘 쓰려고 하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멀리 가기도 합니다. 


서론에 너무 퍼올린 덕에 정작 본론에서는 진짜 써야 할 것이 겉돌고 맙니다. 그러다 보면 한 장 써야 할 분량이 두 장 세 장 넘어갑니다. 아차 싶어 몇 줄에 마무리하고 끝냅니다. 다행히도 지금은 습작이고 초고니 망정이지 현장에서 글쓰기라면 구성과 구상에서 탈락일 겁니다.


서론이 길어지면 일단 지루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재미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지루하면 안 됩니다. 내가 길게 늘어놓은 서론은 말 그대로 드라마틱하게 지겨운 겁니다. 이거 뭐지? 하는 호기심보다는 언제 시작하지? 지루해서 더는 읽히고 싶지 않습니다. 


아, 역시나 서론과 본론의 경계 없이 또 주저리주저리 되었습니다. 이게 다 서론이 길어서 그런 겁니다. 요점만 간단하게 읽히듯이 본문이 뚜렷해야 합니다. 전체를 보면 프롤로그가 다 하지만, 하나의 꼭지만 본다면 본론이 잘 되어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서론은 가볍게 툭 건드려서 관심만 갖게 하면 됩니다.


나름 고단하고 길었던 과거는 과거로 끝내고 현재에 충실하자 합니다. 길었던 서론은 덜어내고 지우고 또 덜어냅니다. 그냥 가볍게 임팩트만 주기로 합니다. 



5.

진짜 골프 잘 치는 사람들은 힘을 빼고 가볍게 툭! 그러면 오잘공입니다. 첫 샷을 가볍게 던져두었으니 세컨드 샷부터가 본 게임이 됩니다. 마무리는 그린에서 원 퍼터로 홀인 하는 겁니다. 아, 진작에 골프를 먼저 배울 것을 그러면 글쓰기에 좀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네요.


봄이 오니 골프가 고파집니다. 힘 빼고 가볍게! 툭! 글쓰기 서론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겹지 않을 만큼 가볍게 툭! 건들기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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