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답을 위해 고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20

by 김선하

1.

시절인연! 호시절!!


내가 사람, 관계, 인연을 말할 때 특히 좋아하는 단어입니다. 성인이 된 후, 사회생활 하면서 사람에 대한 실망과 권태가 찾아올 때, 인간관계가 막히고 답답할 때, 나는 고전을 읽습니다. 현자의 말과 어른의 말을 되새깁니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이해하려고, 이해해 보려고 제 딴에는 여러모로 애를 씁니다. 그러다가도 안 되면, 내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다시 마음을 바꿔 인연의 끈을 놓아버립니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가 보오"



2.

사람을 만난다는 것, 익숙해지고 어울린다는 것, 그 시간이 서로에겐 시절인연입니다.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다양한 인연을 만납니다. 각자의 시간을 갖고 조용히 머물기도, 몸과 정신을 들썩이고 좀 떠들어주기도 합니다. 신바람을 불어주어야 좋아할 친구가 있고, 조용히 내 말을 들어주고 짧게 호응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어깨에 힘주고 허세를 부리는 게 어울리는 듯하다가, 어느새 언니면서 동생처럼 애교와 앙탈을 부리기도 합니다.


상황과 환경에 따라, 서로의 처지에 따라, 사람을 만납니다. 이야기 속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듣습니다. 답을 듣는 과정도 다양합니다. 여럿이 모이면 신나고 떠들썩하지만 돌아오면 뭔가 허하고 에너지를 빼앗긴 느낌마저 듭니다. 일대일로 만나면 뭐 하러 그런 소리를 해, 하다가 주거니 받거니 하며 예상외로 힘이 되는 응원의 답을 얻고 오기도 합니다.



3.

죽고 못 살 것처럼 굴던 사람도 이내 시절인연이 다할 때가 있습니다. 아쉽지만 원수가 된 것이 아니니 때가 되면 다시 만날 거라는 희망을 가지고 인연의 끈을 놓아줍니다. 싹둑 잘라내거나 매듭을 동여매지는 않습니다.


반대로 인연이 없을 것 같은 사람과 또는 잊혔던 사람과 우연히 만나 새로운 연을 이어갑니다. 의외로 잘 어울리니 한동안 만나는 설렘과 기대가 있을 겁니다. 이 또한 연이 다할 때까지 억지로 당기지 말고 밀어붙이지도 말고 물 흐르듯 내버려 두겠습니다. 내게 흐르는 물줄기 방향을 물의 세기를 내버려 두고 오는 물길을 막지 않습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이 시절인연이고 호시절이라 생각합니다. 떠날 사람 미련 없고 맞이할 사람 막을 이유 없습니다. 그냥 지금 만나는 사람에게 충실하면 됩니다. 흔히 하는 말로 너무 들이대거나 너무 선을 긋고 볼 일은 아닙니다. 지금 만나는 우리는 인연이 닿아 만난 것입니다. 강요도 억압도 없는 자연스러운 만남입니다. 그러니 서로에게 정해진 관계란 없습니다. 정답을 요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4.

만나는 사람은 때와 사정에 따라 변하기도 그대로 이기도 합니다. 만나는 장소가 달라졌듯이 만나서 하는 이야기가 달라졌습니다. 서로에게 관심사가 달라진 것이지요. 보는 시선이 달라졌고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글을 쓰고 책을 내니 만나는 사람과 주고받는 질문이 변했습니다.

"책은 다 읽었습니까? 어땠나요?"

"요즘은 어떤 책을 읽나요? 책을 쓴다면서 잘 되어갑니까? 힘들지 않았나요?"


물론 책을 냈으니 책 이야기가 우선입니다. 책 때문에 만난 게 아닌데도 책 이야기가 먼저 나옵니다. 내 이야기가 우선시되는 것 같아, 분위기가 이상해질까 머쓱해서, 책 이야기를 뒤에 놓아도 언제 틈을 삐지고 다시 앞에 놓입니다. 질문이 던져지면 답을 해야 합니다.

"글쎄요, 생각 안 해봤는데요"

이런 대답은 성의도 없을뿐더러 내 책을 대하는 성의가 없어 보여서 고심 끝에 답을 해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딱히 떠오르는 대답을 찾지 못합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이 던진 질문에는 그 안에 답이 있습니다. 내가 던지는 질문이, 나에게 향하는 질문이, 바로 지금 내 관심사이고 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질문이 절대적으로 답답해서 답을 얻고자 하는 질문만은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너는 어떠니?" 보다는 "괜찮아!" "좋아, 해봐" 확인의 답을, 응원의 한마디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답정녀라고 하지요? 별안간 떠오른 질문이 아닙니다. 정답을 얻고자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많은 질문 가운데 특히 내가 하는 질문의 상당수는 답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이 길을 갈 예정이니 응원해 달라는 겁니다.



5.

내가 책을 낼 때 의견을 묻는 것은 책을 낼까 말까가 아니고 책을 낼 것이라는 나의 다짐을 말한 겁니다. 책 표지가 어떠냐는 질문은 책이 곧 나올 것이며, 이 표지로 갈 예정이니 관심 가져 달라는 뜻입니다. 요즘 들어 책을 읽느냐는 질문은 책 한 권 사달라는 겁니다. 책 읽었으니 질문 있어? 하는 것은 내 책을 읽어주어서 고마우니 밥 한 끼 먹자는 것입니다.


질문은 답을 향하고 있고 용기와 응원의 박수를 보내 달라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물으면 최고의 답을 위해 너무 고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벼운 조언과 격려와 박수, 그도 아니면 그냥 밥 한 끼 하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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