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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Aug 20. 2023

편집주의자로서 글쓰기입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51

1.

A1.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합니다!

A2. 보여 주어야 할 때입니다!

A3. 어디서나 가능합니다!

A4.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A5. 한 장으로, 한 줄로, 한 마디로, 한 번에 알립니다!

A6. 상대가 내 것에 관심을 갖도록 합니다!

힌트가 보여준 이것은 무엇입니까?


정답은 기획입니다. 기획은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가 보고, 들고,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상대가 내 것을 갖고 싶도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한 마디, 한 장, 한 큐에 딱 부러지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2.

세상에는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보려는 사람보다 많습니다. 그러니 보여주려는 그 많은 사람과 경쟁하기 위해서,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 의욕이 앞섭니다. 그 결과 상대가 이해하지 못할까 주저리주저리 설명하고, 과한 비유와 예를 들어 말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끝없는 항해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상대방은 어느새 지겨워합니다. 길면 지루해집니다. 뻔한 이야기는 지루합니다.


일타 강사가 일타 강사인 이유는 잘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잘 가르친다는 것은 핵심을 재미있게 전달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좋은 강의도 뻔한 전개라면 지겨워서 안 듣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길어지고 반복되면 잔소리가 됩니다. 라테는 말이야? 가 고리타분한 이유는 구식이어서가 아닙니다. 뻔한 얘기를 뻔하게 길게 늘어놓기 때문입니다.


짧게! 명료하게! 여기에 가능하다면 재미있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다르게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같은 소재라도 구성이 첨가물이 다르면 됩니다. 바라보는 관점을 달리해서 이야기도 접근하는 주제와 방향이 각도록 틀면 달라집니다. 세상을 둘러싼 우리가 대하는 모든 것은, 거기서 거기입니다. 얼추 비슷해 보이는 것을 다르게 보이도록 하려면, 전환과 전개가 맞물려야 합니다. 그래서 기획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획이 철저하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계획 하에 움직입니다. 건성으로 보고 수정하고 얼버무리지 않습니다. 먼저 문제를 접하고 해결하고자 실마리를 건져 올립니다. 그리고 그 실마리 하나로 실타래를 꼬아 옷감을 짜고 옷을 지어냅니다.


보통 책을 만들 때 기획에서 출발합니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왜 책을 내는가? 그 안을 들여다보면 다시 누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왜 하는가? 그것들이 묶이면 이것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쓰인 책이 됩니다.


3.

그런데 내가 쓰는 글에 처음부터 철저한 기획은 없습니다. 아우트라인 정도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동기가 어찌 되었건 하나의 문제를 접합니다. 그 문제라는 것은 사람, 풍경, 음악, 미술, 동작, 사건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화두가 던져지고, 생각을 하게 되고, 이슈가 되는 순간, 그것은 글쓰기의 타깃이 됩니다. 그리고 그 상황과 느낌과 생각을 적습니다.


적어가다 보면 두드러진 생각과 느낌이 발견됩니다. 그것을 키워냅니다. 그리고 주제와 방향을 찾아가면서 한 편의 글, 하나의 원고가 완성됩니다. 이렇게 써놓은 것들은 파일 안에 저장해 두었다가 같은 소재, 주제, 영역 따위로 묶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기획보다는 편집, 기획주의자보단 편집주의자 쪽에 맞습니다. 나는 편집을 강조합니다. 내가 이것저것 주워 모아서 오리고 붙여서 만들어 낸 편집본은 하나의 창작물이고 창조이고 작품입니다. 나는 도서바코드가 찍힌 책은 한 권이지만 그렇지 않고 주제별로 엮어서 나만의 책을 여러 권 만들어 놓습니다. 책을 내고자 시뮬레이션을 하면서 책을 짓습니다.


4.

오늘 또 한 원고 한 뭉치를 꺼내 들었습니다. 매스를 어떻게 잡고 어디서부터 집도할지 나도 궁금했습니다. 다른 각도에서도 접근하고 산만한 글을 하나로 귀결시켜야 합니다. 모아진 글이 산으로 가지 않도록, 내가 흔들리지 않도록 가지를 치며, 내가 생각한 주제와 방향으로 스며들도록 다양한 방법과 적합한 비유를 동원해야 합니다.


일상은 루틴 안에서 움직이지만 글을 쓰고 책을 낼 때, 일상 예술을 펼칠 때, 나는 편집주의자가 됩니다. 일상은 주도면밀하게 예술은 자유분방하게. 오리고 붙이고 지우고 더해서 편집한 작품을 기다려봅니다. 나도 궁금합니다. 요즘 쓰고 있는 이 책이 어느 방향으로 쓰이고 있는지 궁금해서 다시 앞에 두었던 글로 돌아가봅니다. 나의 글짓기는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그 매듭을 언제 지을지 알 수 없음을 알고도고 미련스럽게 글을 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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