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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Aug 21. 2023

나는 글을 썼을 뿐입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52


1.

대학시절 나는 글을 써서 돈을 벌었습니다. 정식 작가는 아니었고 대학생 수습기자, 잡지사 인턴 기자로 일했습니다. 기자가 꿈은 아니었습니다. 신문방송학과 학생들이 흔히 하는 아르바이트였습니다. 돈대신 이력서에 한 줄 올리기 위한 케리어 쌓기용일 때도 있었습니다.


대학 졸업 전 방송작가와 스크립터 방송국 자체 광고 일을 했습니다. 대학 때 부전공으로 출판문학을 기웃거리며 문예지에 글을 싣는 문학도였는데, 졸업 즈음, 방송작가 모집에 응모해서 덜컥 되어버렸습니다. 내 꿈은 방송국 피디였습니다. 여러 차례 낙방하면서 어떻게든 방송국을 들어가 보자는 심정으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작가였습니다. 급하게 MBC아카데미에서 드라마 작가와 구성 작가 코스를 밟고 방송 글 쓰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요령을 먼저 배웠습니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작가는 내 계획에 없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작가가 되었습니다. 명분도 목표도 사명감도 없이 작가 하다가 조감독 되고 그러다가 연출하지! 하는 얄팍한 속내를 감추고 작가로서 연명했습니다. 그러나 일복은 타고난 사람이라 특집이 데일리가 되고, 위클리도 여러 개 하다 보니 데일리가 되어 매일 하는 생방송에 주말 녹음과 위클리까지 겹치는 날은 오프닝과 클로징만 6개입니다.


평소 잔머리 굴리는 것이 글에도 유용했던 모양입니다. 아침 신문 기사 하나로 여섯 개 버전으로 원고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쉽게 쓰인 글이 이런 경우가 아닐까 합니다. 작가라는 사람이 단어 놀이나 하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의미 없는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시간에 쫓겨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사색과 고민도 느낌도 없는 글을 마감에 맞추어 의무감에 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내 글을 읽은 사람이 진심을 얼마나 느꼈을까는 자명합니다. 나를 잃어버리고 내가 없는 글을 쓰고 있다는 반성과 함께 그 책임을 물어 작가를 그만두었습니다. 양심선언이라는 허울 뒤에는 돈이 안 되는 작가 사절이 있었습니다.


2.

회사를 나왔습니다. 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방송 작가 경험과 문학 부전공을 무기로 국어 강사가 되었습니다. 학원에서 강의하는 것 외에 광고문구나 평가서를 작성하는 것은 내 몫이었습니다. 글 좀 써본 경력은 홍보에 영향을 주었고 학원생이 쉽게 모였습니다. 이제 학생들에게 논술도 가르쳤습니다.


입시 반 수업을 하면서 진학 컨설팅과 함께 자소서나 면접 대비를 시겼습니다. 가르친다기보다는 써준다는 표현이 더 맞았습니다. 글 한 장을 위해 쓰고 고치고 다시 고치는 작업이 입시생에게는 시간과 에너지를 상당히 소모해야 하는 것을 압니다. 학생들이 써온 글을 함께 고치는 시늉만 하고 마무리는 내가 해줄게, 하며 자소서대필을 하다시피 했습니다.


수업보다는 글쓰기가 재미있고 수입도 좋았습니다. 하고 싶을 일을 하면서 돈을 번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들어오는 대로 글을 써주다 보니 학생 글뿐만 아니라 성인의 글, 기관이나 센터의 글도 썼습니다. 대상과 장르에 한계를 두지 않고 웬만하면 다 썼습니다.


3.

장소가 옮겨졌을 뿐 나는 다시 글을 쓰고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내가 없는 글을 썼습니다. 처음부터 나를 위한 글이 아니었으니, 나의 이야기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으니, 글 속에 내가 없는 것은 당연했는데 그게 또 불만이고 불편했습니다. 진심이 빠진 글을 쓰는 내 기분이 떳떳하지도 자랑스럽지고 않았습니다. 더는 타인을 위한 글을 대신 쓰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후 어떤 식으로든 나는 글쓰기가 계속되었습니다. 몇 년 전, 마음이 힘들 때 글을 썼습니다. 나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였습니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물론 행복한 일이 있을 때, 도 글을 썼습니다. 너무 속상해서 억울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다가 지쳐 잠들던 나날에서 눈물을 닦고 연필을 들었습니다. 종이에 끄적거리듯 써나갔습니다. 무엇을 써야겠다는 뚜렷한 목표 없이 그냥 그때 감정을 사건을 적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리 울 일도 아니네, 잘못이 있었네, 앞으로는 이렇게 대처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4.

시댁과 마찰이 있고, 세상과 일부 단절된 삶을 살던 어느 해, 엄마가 가장 생각났습니다. 나를 위로할 방법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글을 썼습니다. 할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끄적거렸는데 쓰는 동안 조금씩 화를 삭이고, 마음이 가라앉아 평온해졌습니다.


점점 글 쓰는 시간이 길어졌고 생각하는 시간도 늘었습니다. 글을 쓰면 모든 게 해결되고, 감정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진정으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낍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오늘도 그렇게 글을 쓰고 마음을 다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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