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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Aug 25. 2023

쓸 때가 좋았습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56


1.

- 막달이구먼. 얼마 안 남았네. 힘들지?

- 네. 이제 한 삼 주 남았어요.

- 그래도 애가 뱃속에 있을 때가 편한 줄 알아.

- 저는 빨리 나오기만 기다리는데요?

- 낳아봐. 그때가 좋았지 할 거야.

- 글쎄요.


첫째를 임신해서 막달 앞둔 여름날, 장터에서 만난 할머니 말이 맞았습니다. '애만 낳아봐라, 몸도 가벼워지고 훨훨 날 것 같은데' 그렇게 장담했지요. 이놈을 뱃속에 들인 장장 구 개월, 앞 뒤로 짐을 이고 지고 행상하듯 뒤뚱뒤뚱 어기적 걸으며 다녔습니다. 배가 불러온 것은 임신 오 개월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는데, 심리적인 작용이 더했는지 걸음새와 심호흡은 해산을 앞둔 임산부와 엇비슷했습니다.


칠월칠석 한여름 오후, 이틀 진통 끝에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를 보았습니다. 이제 힘든 거 끝났구나 쾌자를 부르며 산후조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별다른 뒤척임 없이 먹고 자고 싸는 아기 옆에서 젖몸살과 배앓이를 하는 산모는 하루하루 지날수록 장터 할머니 말이 거듭 틀리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아기가 백일 지나 돌을 지나면서 장터 할머니가 자꾸 생각났습니다.

"애 낳아봐라, 뱃속에 있을 때가 좋았지!"



2.

"책 나와봐라, 쓸 때가 좋았지!"


책이 나오고 삼일 지나 내 마음이 다시 그 마음입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렇습니다. 책을 내고 보니 생각지 않았던 일들이 생깁니다. 일상을 비집고 들어온 햇살 한 줌이 어느새 강한 빛으로 내 얼굴을 찌푸려 놓습니다. 잔물결이 여기저기서 밀려오는 듯하더니  어느새 파도가 되어 나를 물가로 밀어냅니다. 보일 듯 말 듯 별 거 없던 하루에 신경 쓸 일이 조용히 다가와서 내 심기를 툭 건드립니다. 이런저런 생각과 고민이 내 등을 누릅니다. 돌아보니 글 쓸 때가 행복했습니다.



3.

글을 쓰는 동안은 내 주변 소음과 잡다한 생각에서 벗어납니다. 어제의 나를 반성하고 다가올 내일을 생각하며 현재에 충실합니다. 오로지 순간의 나에게 집중하고 나 자신에게 진솔해지는 나만을 위한 시간입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적고 그때의 내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때는 하지 못했던 말을 뒤늦게 찾아내서 글로 적어둡니다. 당당하게 따지지 못하고 억울해했던 마음이 이제야 수그러듭니다.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지 다짐도 합니다.


미워했던 사람을 원 없이 글로 조목조목 따져 써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이해하고 용서도 합니다. 기분 좋았던 일상을 글로 적으며 행복해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글이 아니었더라면, 내 취미가 글쓰기가 아니었더라면, 그날의 감정도 기록도 추억도 그냥 버려졌을 겁니다. 쓰는 동안 생각했습니다.


다행이다, 글쓰기가 취미라서.



4.

그렇게 쓴 글은 일 년에 한 번 주제별로 모아 인쇄소에 가져갑니다. 보통 제본을 두 권 해서 책장에 꽂아둡니다. 늘어난 내 기록물을 보며 흐뭇해합니다. 이렇게 나는 글쓰기로부터 자가치유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책을 내기로 했습니다. 쓴 글을 한데 모아 맞춤법을 고치고 지극히 개인적인 내 이야기를 당신의 이야기로 공감할 수 있도록 마무리 짓습니다. 써놓은 글을 모아서 만들면 그것은 문집입니다. 문집은 초등학생도 만들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내가 만드는 것은, 글이 아니고 문집이 아니고 책입니다. 돈을 내고 사서 읽는 독자는 지극히 평범한 한 개인의 사사로운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나의 이야기로 출발했지만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질문에 답을 주어야 합니다. 글쓰기가 개인적인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 혼자 읽고 추억하는 것이라면, 책 쓰기는 사회적인 혹은 공적인 이야기를 서술하고 독자를 변화시켜야 합니다.



4.

벼르고 얼르고 해서 책이 나왔습니다. 임금님은 당나귀 귀다 숨은 외침을 벗어나 모두에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제 내 책을 든 독자는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인지 확인하려 들 겁니다. 혹시나 내가 알던 임금님 귀가 당나귀 귀가 아니면 어쩌나 의심이 듭니다. 재차 확인합니다. 또 당나귀 귀면 그래서 어쩌라고 반문하는 독자가 있으면 어쩌나 궁색한 대답도 준비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것을 나만 알고 있을 걸 괜히 말했나 후회도 됩니다.


 나만 알고 있던 비밀을 숲에서 외칠 때가 좋았습니다. 숲으로 나오니 그 비밀이 어찌 퍼져나갈지 걱정부터 앞섭니다. 어떻게든 알려야 하는데, 아니 퍼져나가기나 할지가 걱정입니다.  


아기를 낳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뱃속에 있을 때가 좋았다는 것을.


책을 내고 보니 알겠습니다. 글 쓸 때가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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