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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Aug 26. 2023

고래에 홀려 계약서에 사인을 했습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57


0.

두 번째 책은 나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책을 내보기로 했습니다. 쓰기의 기술은 아니고, 태도 철학이라 하겠습니다. 구성상 이 이야기는 처음에 전개되어야 했습니다.



1.

다시 서울행 열차에 오른 것은 한남동 오두막을 다녀온 날로 일주일이 지난 수요일 아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수요일을 서울에서 보낼 예정입니다. 혼자 아닌 한두 명과 함께.


무궁화 열차로 대전에서 서울까지 두 시간, 서울역에서 내려 지하철 역사로 내려 4호선을 타고 다시 2호선을 타고 교대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5분 걷습니다. 처음 맞닥뜨리는 왼쪽에서 꺾어 바로 보이는 건물 4층으로 오릅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이 건물 계단을 오르는 게 벅찼습니다. 힘이 들어서가 아니라 뭔가 시작한다는데 설렘으로 말입니니다. 4층 계단까지 무릎에 힘을 주고, 신발 바닥을 계단에 짙게 누르며 올라갔습니다. 그렇게 도착한 이곳. 숨 한 번 고르고 문을 열었습니다.



2.

이번에 나를 반긴 사람은 부끄러운 듯 수줍게 생긴 안경 쓴 친절한 남자였습니다. 사무실 일을 도맡아 해주는 친절한 직원으로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첫 책 출판 기획서에 책 이미지를 맡아주었던 친절한 디자이너였습니다. 고래를 닮은 여인과 바다 이미지의 표지가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때 나는 고래에 홀릭되어 있었고 모비딕, 노인과 바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 빠져있었습니다. 아, 이상한 변호사가 먼저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한 번도 고래 이야기를 한 적도, 그와 대화를 나눈 적도 없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신기합니다. 왜 하필 내 책에 고래였을까요?



3.

지난주 한남동 오두막에서 나와 기차를 타기 전 서초 교육센터에 들러 실내를 둘러보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이곳에 오지 않을지도 모르니, 아니 계약을 할지도 모르는 곳이니, 한번 둘러는 봐야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그곳에 5분도 채 머물지 않았고 그 찰나에 내 눈에 고래가 들어왔습니다. 책꽂이에 굵게 자리 잡은 모비딕이었습니다. 나는 관심 있는 분야에 감정이입이 빠른 편인데, 그즈음 나의 관심과 흥미는 고래였습니다.

 

모비딕!

고래!

됐다!

마음에 들어!


오늘 계약서를 쓰려고 들렀습니다. 지난주부터 이번 주까지 일주일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출판에이전시에 대해 더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비딕 한 권이 들어앉은 이 공간이 마음에 들었고, 그것으로 이곳과 인연의 끈을 맞닿았습니다. 대표 한 명과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것, 커뮤니티 카페에 들어가 몇 개의 글을 읽은 것, 그곳에서 진행한 글쓰기 챌린지에 도전해서 버틴 것, 이것이 내가 그곳과 함께 한, 그곳을 알기 위해 스스로 했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4.

한남동에서 미팅이 나쁘지 않았다는 것으로 그때 이미 결심은 섰습니다. 그래도 글쓰기 코칭비가 한 끼 식사비는 아닌지라 딱 하루만 고민해 보자는 마음으로 계약을 일주일 미루었고, 그날이 오늘이었습니다. 계약은 하겠는데, 한번 묻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대표에게 다시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질문에 답이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에게 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나의 질문은 내가 원하는 답을 줄 당연한 사람에게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

글이 별로인 사람이 여기 와서 책을 내달라고 막무가내면 어쩌시겠어요?

글이 너무 아닌데 책을 내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해야죠!

그래도 내달라고 들이대면요?

하…. 어렵죠. 그러나 우리가 출판하도록 도와드릴 수 있습니다! 제가 그 일을 합니다!

"

나는 답을 얻었습니다. 나는 원하는 답을 얻으려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5.

대학 시절부터 기자로 작가로 밥벌이를 해왔습니다. 물론 내가 글에 정점을 찍었다면 여기 있지 않았겠지요. 나는 대학 졸업 후 방송국에서 작가 겸 조연출로 일을 했습니다. 원고를 쓰고 연출을 하는 것 외에도 영상과 음향 편집을 해야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기계치입니다. 모든 종류의 기계를 무서워했고, 내 손을 거쳐 간 영상기기나 음향기기는 문제 발생이라는 경고등이 켜졌습니다. 절대적으로 '기기는 적성에 안 맞음' 그들의 평가에 인정했고, '글만 써서는 안 되는 저널리스트 사회'에서 루저가 되었습니다.


이십 대에 썼던 나의 인생 목표에는 사십까지 돈 많이 벌고 은퇴해서 전업 작가 되기! 였습니다. 요즘 말로 파이어족이 되려 했는데 나는 지금 오십입니다. 돈을 많이 벌지도 못했고, 은퇴도 하지 못했고, 전업 작가도 되지 못했습니다. 내 계획에서 10년이 도태된 것입니다.


더는 미룰 수 없었습니다. 작가와 기자로 조연출로 밥벌이를 한 게 20년 전이고, 출판사에 기웃거린 게 20년 전이었습니다. 나는 오랫동안 책을 내기 위해 혼자 글을 쓰고 책을 내는 시뮬레이션도 해 보았습니다. 일부 출판에서는 내가 쓴 초고로 당장 책을 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쉽게? 하는 의문이 들었고, 내 첫 책은 후회 없는 출판사를 만나게 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중에 인연을 만났습니다. 세 번의 불발 이후 인연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이곳에서 인연의 줄을 잡았습니다.


그날 나는 고래에 홀릭되어 고래가 이끄는 대로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연구생이 되어 출간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저 고래 한 마리를 보았을 뿐인데 그 고래가 나를 이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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