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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하 Aug 29. 2023

프롤로그 위한 영화 한 편 보겠습니다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60

1.

"엄마가 죽었다"


엄마의 푸르스름한 찬 겨울 바닷빛 얼굴, 동시에 직접 내 눈에 박힌 무감각적인 무표정한 이목구비. 죽은 사람 색깔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혈색을 다 빼낸 멍울진 시퍼런 상체. 내가 기억하는 안치실의 차가운 벽과 스테인리스 패널을 둘러싼 내 엄마의 차가움.


처음 가본 안치실에서 하얀 천을 걷어내고 직면한 그날 그 순간, 그 느낌이라는 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는 것이 결국 "엄마가 죽었다"


이십 년이 지나 엄마책 프롤로그를 위해 다시 그날을 기억에서 꺼내려합니다. 나의 몸은 거실 대리석 바닥에 몸져눕습니다. 궤에 들어간 듯 일체의 움직임 없이 천장을 바라봅니다. 등골이 시려 어깨 등 엉덩이를 들썩이며 대리석에서 몸의 부분을 좌우로 흔들며 떼어내지만, 그날 그 순간의 서슬 퍼런 찬 기운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목욕탕 가서 냉수를 뒤집어씁니다. 머리털이 하늘로 향해 주삣 새워질 만큼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는 얼음처럼 딱딱해지더니 굳어지는 듯했습니다. 내 몸은 이미 드라이아이스로 변해 무엇이라도 태울 듯 몸서리치게 차갑게 감염되었습니다. 그리고 쓱 스쳐 지나가는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한 장면이 머릿속에 박힙니다.


2.

장례식장에서 부친상을 당한 아들이 클로즈업됩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 앞에 무심하게 차려진 설렁탕 한 그릇. 죽은 시체의 차라움과 죽은 고깃국의 뜨거움이 아들의 얼굴 너머로 클로즈업됩니다.


죽음, 생의 마감이라는 공통된 전제하에 대상에 따른 다른 묘사와 이를 둘러싼 감정의 전이 혹은 변이가 느껴집니다. 장례식에서 상을 당한 당사자와 이를 방문한 조문객은 고인을 대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같은 죽음이지만 각자 느끼는 감정은 다릅니다. 천지 차이입니다. 나는 장례식장 고인의 딸입니다. 상주가 되었습니다.


나의 책은 “엄마가 죽었다” 로 시작해 “그래도 살자”로 끝낼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과 삶을 대조적이면서 유연하게 이어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시작을 죽음이라고 어둡게 잡아놓고 그래도 행복하다는 밝은 마무리가 어떻게 연결될지 사이사이에 무엇을 넣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작도 해야 하고 끝도 내야 합니다. 내가 해야 하는 겁니다.


3.

시작이 반이라고 그래서 시작이 어려운 겁니다. 시작만 하면 어찌어찌 이끌고 갈 테고, 마무리도 지을 것 같습니다. 고민과 고통이 벌써 몇 시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그 시간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노트북을 켭니다.


노트북 하단 작업표시줄에서 네이버 마크를 클릭합니다. 일본 영화 <굿바이>를 유료 다운로드했습니다. 프롤로그를 마무리 지어 줄 희망으로.


내가 이 영화에서 보고 난 후, 프롤로그 방향을 잡을 수 있을까요? 결론은 일본 영화 <굿바이>가 방향과 감정선을 잡아주었습니다.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의 표정이, 바이올린을 켜던 그와 염습하던 그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나는 알아차렸습니다.


'시작은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할 수 있겠어. 산을 넘을 수 있을 거야.'


4.

죽는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모든 것에서 이별이다. 희로애락을 모두 떠나 무감각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을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이다. 그 문을 열면 죽은 자와 산 자는 다시 어떤 식으로든 만난다. 죽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다음 생애로 향하는 낯설음이다.


죽음은 수고한 자들이 다음 세계를 위해 쉬어가는 숭고한 휴식처이다. 지난 시간을 나는 이곳에서, 엄마는 그곳에서 서로를 보고파 그리워하며 지냈다. 우리 각자의 자리에서 그 선을 넘을 수 없으니, 잠시 쉬었다가 다시 문을 열고 새로운 세상에서 만날 것이다.


그때도 나와 엄마는 엄마와 딸 할 것이다. 그러니까 보고 싶어도 조금 참고 기다리자. 우리 다시 만날 그때를 위하여 힘들면 힘든 대로,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기꺼이 기다리기로 하자.


친애하는 엄마께 나는 엄마 헌정 에세이를 보내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할 참이다. 나는 여기서 할 일이 좀 더 있으니 그곳에서 엄마는 편히 쉬며 기다려 달라고 청할 셈이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를 곁에 두지 못하지만 나는 곁에 있음을 느낀다. 잔잔한 바람은 잔잔한 대로, 거친 파도는 거친 대로, 후각을 자극하는 꽃내음은 강렬함으로, 가슴 저린 음악은 애달픔으로 각각 그 흐름 속에 엄마를 느낄 수 있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오늘도 내 가슴에 새겨진다.


4.

영화 <굿바이>에 나오는 그 대사 하나가 내 프롤로그를 열었습니다. 몇 시간을 헤매다가 순간 낚아챈 단 몇 마디는 다음이었습니다. 영화 주인공은 목욕탕 단골 할아버지를 그의 일터인 화장터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문지기야. 죽음은 문이라고 생각해. 문을 열고 나가면 다음 세상으로 가는 거지.

고마워요. 다시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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