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과 여우 중 당신은 무엇인가요?

쓰는 자의 일상 철학 063

1.

여우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단어는 무엇인가요?

여성, 전설의 고향, 구미호, 꼬리, 예쁘다, 얄밉다, 약사 빠르다 

드라마 몰아보기를 했습니다. <구미호뎐>. 등장하는 구미호는 아주 잘 생생기고 똑똑한 사려 깊은 남자입니다. 그런데 참 뺀질거립니다. 아마도 옛이야기나 동화책에 나오는 교활하고 약쌉한 느낌의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모델로 삼았나 봅니다. 

그럼 곰 하면 어떤 이미지가 오르나요?

곰탱이 덩치 강함 남성 갈색 테디베어 

곰은 여우와 함께 등장하면서 상대적으로 더욱 묵직하고 성실하고 굳세지만 좀 미련한 인상을 풍깁니다. 단군 신화에 등장하는 곰과 호랑이에서 곰은 우직하고 참을성 있게 백일동안 쑥만 먹고 기다린 끝에 웅녀가 되어 역사 속 위인이 되는데 우리에게 곰의 이미지는 이때 강하게 자리 잡은 듯합니다. 

2.

오늘은 곰에 가려진 여우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여우의 본질을 알려주는 책 한 권, 어린이 필독서로 알려진 <책 먹는 여우>입니다. 주인공 여우 아저씨는 밋밋하고 별거 없는 책에 간을 해서 먹습니다. 요리사가 냉장고에서 꺼낸 별 거 아닌 야채로 다양한 음식을 해내듯,  여우아저씨는 책을 가지고 놀며, 제대로 된 책을 만드는 재주꾼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어린이도 아니었고, 지금도 많은 책을 읽지는 않습니다. 그나마 어릴 적 세계 명작 중에서 읽을 책은 우화집이었습니다. 지금 읽는 책을 나열해 본다면 소설이건 수필이건 인간 사회와 인간의 모습을 동물에 빗대 묘사하는 작가를 좋아합니다. 사물 묘사나 상황 설정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동물을 묘사하고 사회에 빗댄 풍자글은 현실감을 느낄 수 있어서 좋습니다.

3.

프랑스 우화집 <여우 이야기>로 여우의 지혜는 화룡점정을 찍습니다. <Le Roman de Renart>가 원제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이 책은 프랑스에서 아동 필독 도서이며 우리나라에는 어른이 읽는, 어른을 위한 책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여우와 늑대의 싸움이라는 중요한 주제가 중심을 이룹니다. 주인공 여우 르나르는 고대 게르만어 ragin(충고)와 hart(강한)의 합성어에서 생긴 말로 유력한 충고자라는 뜻을 지닙니다.

르나르를 표현하자면 '예의 바르다!' 그리고 '상황 파악이 빠르다!'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기복을 드러내지 않고 반듯한 자세로 일관성을 유지합니다. 그것이 상대를 경직시키거나 불편함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삐딱한 자세를 한 상대를 바르게 앉도록 해줍니다. 르나르의 반듯함이 나는 좋습니다.

이 책은 처음 프랑스에서 12세기 후반에 쓰였고, 17세기 라퐁텐의 우화로 이어집니다. 사회를 풍자하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며 이때의 사회상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을 동물을 등장시켜 재미있게 풀어갑니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뒤통수를 맞은 듯 정신을 차립니다. 나에게 경고 문구를 새기며 정신 놓고 사는 나에게 경고합니다. 

책에 등장하는 단순한 상담이나 어설픈 조언으로 채우지 않습니다. 상대의 고집스러운 의도를 단순한 유희가 아닌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도록 강력하게 조언합니다. 적당히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방식보다는 앞 뒤를 재고 앞 날을 예상해서 행동합니다. '된다 안된다 가능하다 불가능하다' 룰렛을 돌려 화살표가 멈춘 지점에 나의 진행에 조용히 일침을 가합니다.

4.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습니다. 물론 해야 할 일도 산더미입니다. 일을 좋아하고 노는 것을 좋아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바쁘게 벅차게 하루를 움직입니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은 기꺼이 합니다. 다중적인 인격과 다양한 성향 탓에 special보다는 unique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특별함보다는 독특하거나 유별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여우는 투닥거리다가 때를 알고 치고 빠지는 노련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양성을 인정하고 남들과 다른 점을 절하 평가하지 않지만 자신의 평가에도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는 상대방의 다양성을 틀리다가 아니라 다르다는 개념과 관점을 정확히 확인시키며 자신을 옹호하고 지킬 줄 압니다.

목마름에 물 한 잔 권해준 사람은 갈증 해소 이상으로 목숨을 건져준 사람이 됩니다. 삶의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뭔가 부족했던 나에게 여우는 반듯한 예의와 따끔한 충고, 그리고 다름을 인정해 준 삶의 기준치를 높여주었습니다. 여우이야기에 나오는 주인공 여우는 나의 정체성이 흐릿한 이 시점에, 적재적소에 내 앞에 나타나서 삶이 더 재미있어질 것이라고 귀띔해 준 조언자, 지혜로운 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