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캐셔와의 30분 대치전
2023년 2월 18일
본격적으로 내가 지내게 될 Klagenfurt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비록 전날 새벽까지 Irish Pub에 있었지만, 게으름피우고 싶지 않았다. 새벽 6시,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간단히 요가로 몸을 깨웠다.
도착한 지 이틀 만에 드디어 내가 가져온 전 재산을 펼쳐봤다.
레깅스, 츄리닝 셋업, 후드티, 청바지, 운동화 두 켤레.
고추장 튜브와 라면 3봉지, 햇반 2개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해야하나... 일단 당장 먹을만한 건 오스트리아행 대한항공 기내식에서 챙겨둔 빵 한 조각뿐. 딱딱한 빵을 씹으며 전날 밤을 떠올리니 마치 전생 같았다.
이탈리아, 프랑스, 알제리… 다국적 친구들과 새벽까지 웃고 떠들었던 것 같은데 오늘의 현실은 그냥 가난하고 가진 것 없는 유학생 신분이라는걸 깨닫게 되었달까?
그래서 시내에 가서 장을 봐보기로했다. 장을 보러 시내에 가기 전, 괜히 공유주방에 들렀다. ‘어제가 꿈은 아니었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곳엔 누군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나와 동갑인 이탈리아 소년 Riccardo. 그는 주키니와 파스타 면 하나로 레스토랑 같은 요리를 뚝딱 만들어냈다. 라면 물조차 못 맞추던 내게는 그 모습이 부러움 그 자체였다. 한 입 달라는 말도 차마 못 하고 대신 다짐했다. 나도 오늘은 근사한 요리를 해먹으리라.
버스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다행히 전날 친구들에게 버스 티켓을 저렴하게 끊는 법도 배웠고, 구글맵도 있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도보로 30분 거리였지만 막상 구경해보니 도로는 자동차 전용이라, 버스를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내는 자라, H&M, 비건 아이스크림 가게까지 있을 정도로 제법 컸다. 유럽은 처음이라 눈에 보이는 모든 풍경이 새롭고 예뻤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클라겐푸르트는 이탈리아풍이 가미된 동유럽 스타일의 전형적인 도시라고 했다. 그때의 나는 그저 ‘와, 내가 진짜 유럽에 있구나’ 하는 벅참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숙소 근처에서 Hofer와 Euro Spar라는 두 개의 대형 마트를 발견했다.
Spar에서 후라이팬과 감자, 고기, 양파 같은 기본 식재료를 담으니 92.52유로. 한국 돈으로 약 15만 원. “첫 장보기니까 그렇지…” 하며 애써 위안했지만 속은 쓰렸다.
이제는 진짜 꼭 필요한 것만 사자 마음먹고 Hofer로 향했다. 직원에게 Sim Card 있냐고 묻자, 빨간머리 캐셔가 하나를 내밀었다.
“혹시 이거 진짜 Sim Card 맞죠?” 다시 한번 물었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Danke!”를 외치며 계산을 마쳤는데… 눈앞에 찍힌 금액은 30유로.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Excuse me, this is not Sim Card…”
“맞아. 기프트 카드야.”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빨간머리 캐셔로부터 대답이 툭 던져졌다.
나도 너무 어이가 없어 그녀에게 환불을 요청하자 돌아온 말은 단호했다.
“안 돼. 이미 개통됐어.”
기프트카드가 그냥 계산을 했다고 개통이 된다고? 억지 같았다.
나는 “다른 직원을 불러달라”며 버텼고, 그녀는 나를 무시하며 계산을 이어갔다.
그렇게 30분간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같이 있던 언니는 “그냥 다른 유심 하나 더 사고 가자…”라 했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아시아인조차 보기 힘든 이 작은 도시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으면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될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나중에 만난 아시아 학생 셋이 똑같은 일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30분을 대치하고 있으니 빨간머리 캐셔는 자신은 영어를 나만큼 못하니 영어를 잘 하는 다른 직원을 불러주겠다더니 금발머리의 직원을 불러줬다.
난 이제야 상황이 해결될거라 믿었고 너무 반가워서 “Hallo!”라는 독일어 인사와 함께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