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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퀸스드림 Jan 20. 2022

부정적인 현실이 너를 힘들게 할 때 읽어보렴.

이런 상황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희망이 될 거야.


안녕~ 딸!  정말 오랜만에 눈이 펑펑 내리는구나.

아직도 엄마는 젊은 가봐. 눈이 내리면 길 미끄러운 건 둘째 치고 기분이 좋아져. 특히 어제같이 펑펑 내리는 눈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깨끗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구나. 소복하게 쌓인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드득 소리가 더 힘차게 발을 디디게 한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못했단다.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지. 어제 저녁 지인과 통화하다가 가게 문을 닫았다는 말을 들었다. 코로나 3년 차가 되니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서 이제는 그만둔다고 하네. 어떻게든 버텨 보려고 발버둥 쳤는데, 같이 일했던 사람들 내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무섭게 나가는 고정비에 무너졌다고 한다. 그 친구의 성실함을 알기에 엄마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단다. 그냥 듣고만 있었어.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위로한다고 위로가 될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그냥 그 친구가 속에 있는 말을 다 꺼내 놓을 수 있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들어만 주었다. 앞으로의 생활도 걱정되고, 또 커다란 좌절 앞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조차 두려움을 느끼는 친구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면 좋을까 .... 전화 끊으면서도 계속 그 마음이 생기더라.



엄마도 너무 속상했어. 듣고 있는 내내 목이 메더라. 친구 몰래 눈물을 살짝살짝 찍으면서 들키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단다. 왜 이렇게 열심히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정말 큰 욕심내지도 않았고, 아등바등하면서도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그렇게 산 것이 잘못된 것이었을까?






엄마도 경제적으로 부족할 때가 많아서 그런지 그 친구가 느끼는 감정이라든지, 두려움을 알 것 같더라. 엄마는 20살부터 경제적 독립을 했었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내가 벌어야 했었지. 일본 유학을 가고 싶어서 2년 동안 쉼 없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갔는데, 환율이 엄청 올라서 3개월 만에 그 돈을 다 쓰게 된 거야. 학비 내고 3개월 집값을 내고 나니 내 통장에는 0원이 찍히더라.



한국도 아니고, 타지에서 통장 잔고까지 없으니... 얼마나 불안했는지 몰라. 비행기 안에서 히라가나를 외우면서 갔던 나인데,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않으면 안 됐지. 일본은 그 당시 물가가 워낙 비싸서 학생비자를 받은 사람들도 아르바이트가 허락이 되었단다. 그럼 뭐해...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데...



그때 처음으로 비행기도 타보고, 외국에서 살아보겠다고 떠났는데 돈이 없어서 한국에 돌아간다는 말이 차마 나오지가 않더라. 정말 자존심이 상했었어. 그래서 연극배우가 대본 외우듯 일본어 면접용 대사를 외워서 면접을 수도 없이 봤더랬지. 얼마나 많이 떨어졌는지 몰라. 당연하지... 이제 막 대사를 외운 연극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얼마나 잘했겠니.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계속 떨어지다 보니 나중에는 내가 몇 번을 떨어졌는지도 까먹었어. 처음에는 자존심도 상했는데, 나중에는 웃으면서 손까지 흔들며 나올 때도 있었지.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얼마나 두려웠는지 몰라.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나는 한국에 가야 한다는 사실이 주저앉게 하지도 않더라.



물론 우에노 공원에서 소리 내어 운적도 많았단다. 아무리 마음을 다독여도 계속 떨어지니,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구나...라는 생각에 서럽고, 억울하고, 다른 이유도 아닌 돈 때문이라는 생각에 진짜 자존심이 상했단다. 나중에 거의 100번 정도 가까이 떨어졌을 때 마지막으로 붙었고, 거기서 1년을 쭉 일을 했었더랬지. 그곳에서 일본어를 못해 정말 많은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래도 좋은 추억만 남는 것 같다.



특히 일본어 못한다고 구박했던 점장님 덕분에 나의 일본어 실력이 많이 늘었지. 그 점장님이 얼마나 독했냐면 절대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이었거든. 누군가 실수하면 엄청 혼냈던 사람이야. 여자아이들이 화장실에 가서 울고 있으면 화장실까지 쫓아가서 뭐라고 했었단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엄마는 일본어를 제대로 못해서 그 사람이 혼내더라도 다 알아듣지 못했어. 하지만 아무리 외국어라 해도 나한테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건 눈치껏 알아듣겠더라. 그럼 뭐해... 제대로 답변도 못하는데...



그냥 집에 가는 길에 혼자서 엉엉 울면서 갈 뿐이었지. 웃기는 말이지만, 그 사람한테 대들고 싶어서 (실은 욕 한마디 하고 싶어서) 일본어 공부 열심히 했단다. 만약 엄마가 그때 일본어를 잘했더라면 엄마도 다른 친구들처럼 금방 나왔을지도 몰라. 하지만 엄마는 거기밖에 없었거든. 그 가게가 엄청 잘 되는 곳이라 일하는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는데, 까다로운 점장님 때문에 들어오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얼마 있지 못하고 바로바로 나가는 곳이었어. 그래서 점장님도 어쩔 수 없이 말 못 하는 나를 데려다 쓴 거고,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만두는 관계로 원든 원하지 않던 점점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단다.



그곳 역사상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1년 버틴 사람은 나였단다. 나중에 점장님이 일본 비자를 받게 해 줄 테니까 여기서 같이 일하자고 할 정도였지. 나한테 미운 정이 많이 들었나 봐. 하긴 욕하면서 친해진다고 하더니 엄마도 그렇긴 하더라. 그 사람은 자신의 일에 대해서 철저한 사람이었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려다 보니 실수에 대해서 예민했던 사람이었지. 한편으로는 자신의 삶에 늘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어. (이것도 20년이나 지나서 보니 그런 생각이 들지, 그때 당시에 나에게는 사악한 사람이었단다.)








참 웃긴 일이지만, 점장님한테 소심한 복수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본어가 지금까지 엄마를 밥 먹이고 있단다. 생각해보면 희망이 엄마를 일으켰던 것 같아. 24살의 엄마에게는 꿈이 많았거든. 하고 싶은 일이 정말 많았단다. 그 꿈이 엄마를 버티게 해줬던 것 같아.



그 점장님이 나에게 못된 말을 해도, 내가 여기서 버티지 못하면 한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이 악물고 버티게 했고, 언젠가 시원하게 일본어로 대들 수 있는 날을 꿈꾸며 24시간 하는 도서관으로 향했었지. 또 호주로 가고 싶다는 새로운 꿈이 있었기에 그 시간들을 보냈던 것 같아.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있었기에 천적을 피하듯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 그래서 엄마는 일본에 대해서 좋은 추억들도 많아. 희망은 사람을 일으키더라. 너에게도 경제적인 상황으로 힘들 때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있겠지. 그럴 때 너의 생각까지 가난해지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 이런 상황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희망이 될 거야.



엄마가 그랬어. 내가 영원히 일본어를 못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 언젠가는 이 사람에게 시원하게 욕하고 사표 던질 거라는 생각, 그리고 일본어를 정복하고 영어를 정복해야겠다는 꿈이 그때마다 엄마를 일으키더라고.




친구 덕분에 옛 생각도 하게 되었구나. 그 친구에게도 꼭 말해주고 싶다. 지금 너의 상황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고...


그때 그 점장님은 잘 계시려나...

만약 다시 보게 된다면 꼭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드리고 싶구나.

갑자기 그분 생각에 엄마의 20대가 생각나 조금 설렜다. 역시 펑펑 쏟아지는 흰 눈은 사람에게 희망을 주는구나!!! 오늘 엄마의 갬성이 좀 짱인듯!!! ㅎㅎ

오늘 잔소리는 여. 기. 까. 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네가 되길 바라는 엄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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