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고 길~~게 살아봐!!
일본에서는 이사를 가면 소면을 먹는다. 소면처럼 가늘고 길게 살라는 의미로 말이다. 한국에서는 반대로 짧고 굵게 살다 가자고 한다. 어떤 삶이 더 좋을지는 모르겠지만, 워낙 짧고 굵게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라서 그런지 가늘고 길게 살면 왠지 좋지 않은 의미로 느껴진다.
5년간의 경력단절 시간을 보낸 후 재입사했을 때, 나는 5년 전과 똑같은 직급으로 돌아갔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5년 전의 내 모습보다 지금의 내 모습이 훨씬 더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을 인증할 수 있는 자격증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학력이 높아지거나 자격증을 하나 더 딴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성숙미로 봤을 때 진짜 어른이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육아를 하면서 성격도 완전 바뀌어서 ‘진짜 착해졌다’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욱했던 성격이 많이 죽고, 인내심이 그때보다는 많이 늘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하다. 다들 애 낳고 아줌마 돼서 싫다고 하는데, 나는 아줌마의 좋은 장점을 잘 이용하고 있다.
아줌마가 되었다는 것이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나는 "다시 20대 시절로 돌아갈래?"라고 묻는다면
선뜻 "YES!!!"라고 말할 자신도 없다. 불안하기만 했던 20대 보다, 그래도 이제는 세상 삶에 나름 익숙한 40대가 좋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이 먹고 편한 점도 있다. 더 이상 이성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그런 피곤함을 느끼며 살지 않아도 된다. 이제 나는 여자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편하다. 그렇다고 나를 꾸미지 않거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아니다. 다만 필요 없는 곳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34-24-34의 몸매를 유지하지 않아도 된다.(ㅎㅎㅎ 전에 그랬다는 것은 아니다.) 딸아이가 내 똥배를 보며 "난 엄마처럼 똥배 나오고 싶지 않아!"라는 말을 하면 "너 때문에 그래! 너 낳기 전에는 나도 날씬했거든!"이라며 우리 엄마가 나에게 해준 말을 그대로 내 딸에게 해주기도 한다. 그냥 그렇게 남의 핑계를 대며 맛있는 음식 먹는 즐거움에 푹~ 빠져도 괜찮은 나이이다. 이제는 날씬한 것보다 건강한 게 최고인 나이가 됐다며 면역력을 위해 잘 먹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나도 모르게 아줌마 근성이 나와도 괜찮다. 예전에는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고 괜히 다른 사람의 일에 관여하는 게 싫어서 보고도 못 본 척을 많이 했는데, 이제는 정의의 사도가 되었다. 뉴스를 보며 제대로 못하고 있는 정치인들을 욕하기도 하고,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을 보면 흥분하기도 한다. 신고 정신이 투철해지기도 하고, 약자들을 대변해야 할 것만 같은 투사가 되었다. 내 아이를 위한 일이라면 목소리 높이기도 하고,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도 갖는 사람이 되었다.
진짜 무엇이 중요한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삶의 경험을 통해서 지혜가 쌓인 것이다. 지혜란 무엇일까?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다. 나의 중심이 세워져 있지 않으면 어느 때에 YES or NO를 할지 모른다.
지난 5년 동안 나는 수많은 새로운 경험들을 통해서 그전보다 훨씬 더 어른다운 어른으로 성숙해 갔고 그것이 분명 사회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사회에서는 나의 그런 성숙미를 인정해 주지 않는다.
억울해 하는 나의 마음을 아셨는지 나에게 “가늘고 길게 살아. 그게 현명한 거다. 직책에 욕심내지 말고... 일 잘하면 저절로 되는 게 승진이야.” 하셨다.
코로나로 모두 다 힘든 지금 이 시기에 빨리 승진 한 사람들이 빨리 퇴사를 한 경우를 너무 많이 봐왔다. 여의도라 증권가에 있는 분들, 금융권에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시는데 빠르게 임원 진급된 것을 축하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상황이 안 좋아지니 그런 분들부터 자리를 비우게 되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예전처럼 승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없어졌다. 전에는 회사 사람이 되어 내가 뒤처진 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엄청 컸다면 지금은 굳이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사내 정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어졌다. 같이 휘말리고 싶지도 않고, 네 편 우리 편하면서 편 가르기에 참여하고 싶지도 않다.
남들은 나보고 “나이 먹어서 그래”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제 그런 것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정말 사장님 말대로 내가 일 잘하면 사장의 입장에서는 잘하는 사람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지금 내가 회사 생활을 하는 게 가늘고 길게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전처럼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굴고, 사내 정치를 하면서, 모든 사람이 나의 경쟁자인 것처럼 인간관계를 불편하게 하면서 살기 싫다. 그런 거 다 필요 없으니까 다 내려놓고 편하게 재미있게 회사 생활을 하고 싶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내가 내 욕심을 내려놓는 순간 회사 생활이 참 재미있어졌다. 사람들의 좋은 면이 보이고, 어떻게 하면 저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니 내가 행복해진다. 이렇게 회사 생활한다면 오래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삶의 반전이다. 이런 것이 가늘고 길게 사는 삶이라면 충분히 짧고 굵은 삶보다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