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미니
나는 모태신앙이다. 모두가 태어날 때부터 죄인이라고 가르치는 기독교이지만 그 중에서도 동성애자는 가장 죽을 죄인 취급 받기 때문에 정체화 이후로 교회에 나가지 않은 지는 오래다. 하지만 누가 나에게 종교를 물어보면 나는 아직도 기독교인이라고 말한다. 나의 존재 자체에 상처를 내는 종교를 왜 나는 버리지 못하는 것일
까. 이웃에 대한 사랑을 설파하면서 그 어떤 종교보다 배제적인 기독교의 모순이 지긋지긋하고, 신의 존재에 의문이 드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종교라는 끈을 놓지 못하는 이유를 나는 <미세리코르디아> 속 신부님을 통해 찾을 수 있었다.
영화의 주인공인 제레미는 과거에 일했던 빵집 사장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고향 마을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장의 아들 뱅상을 순간적인 분노를 못이겨 살해하고 만다. 뱅상의 엄마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그를 향한 의문의 시선은 점차 커지고 경찰 수사도 그를 옥죄어 온다. 그런데 이미 그가 살인자라는 걸 알고 있는 신부는 제레미를 향해 당신의 범죄가 삶을 가로막아선 안된다며, 그를 신고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제레미의 살인이 왜 벌어졌는지의 흔히들 따질법한 인과관계는 신부에게 중요하
지 않다. 죄책감에 못 이겨 자살하려는 제레미를 멈춰 세운 신부는 세상은 이미 멸망해가고 있고 얼마 안 가 지구에서 생명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지금 이렇게 죽는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묻는다. 그는 대뜸 제레미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죽음은 묻어두고 살아있는 동안만이라도 서로 사랑하며 맘껏 욕망하며 살자고 한다. 신부는
자신이 말하는 ‘무상의 사랑’을 자신의 발기된 성기를 통해 몸소 실천하는데,
여기서 단순한 성적 욕망이나 성애적 사랑을 뛰어넘는
숭고하고 신성한 사랑이 느껴졌다면 과장일까.
신부의 말과 행동은 지금 우리의 도덕 관점과 그가 믿는 기독교적 관점에선 분명히 어긋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영화는 신부를 통해 그렇게 도덕적 잣대를 지켜온 세상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묻고 있다. 내가 종교를 믿으며 늘 풀리지 않았던 질문은 신부의 말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신께서 날 지켜준다는 안온한 안락감에 빠
져 한가로이 영화를 보고 축구장에 가는 지금, 지구 반대편에서는 수많은 생명이 죽어나가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도덕관과 윤리관을 붙들고 앉아있는 게 무슨 의미인가. 하물며 인류 선(善)의 최후의 보루인 종교마저도 차별과 배제를 일삼고 있는데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레미는 모든 걱정을 뒤로한 채 남편과 아들을 잃은 마르틴 옆에 누워 미소를 띤 채 잠을 청한다.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던 그 마을에 제레미가 새로 빵집을 열고 먹고 마시며 사랑하는 마을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이미 죽음이 난무하고 파국에 다다른 지금, 여기에서 우린 어쩌면 사랑의 재건이 필요하다는,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명제를 다시금 떠올린다. 결국 내가 종교를 지금껏 놓지 못하는 이유는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신이 말하는 그 자비로운 사랑을 기반으로한 세상이 가능할 거라고 믿기 때문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