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연이 뭐라 하든지 말든지'

by 도롱

by 퀴어씨네클럽

'추구미’란, 자신이 추구하는 미적 이미지와 라이프 스타일을 뜻한다. 영화〈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의 주인공 하동화는 오랫동안 내가 동경해 온 삶의 방식, 곧 나의 추구미였다. 동화는 잘나가는 변호사 아버지를 둔 30대 시인으로, 300만 원도 채 되지 않는 중고 클래식카를 타고 다니며 결혼식 촬영으로 필요한 만큼만 벌어 쓰고, 가족과는 철저히 거리를 두며 세속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자신만의 ‘바이브’로 살아간다.


나는 알고 있다. 그가 사는 삶을 나는 결코 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세상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며, 현재보다 오지 않은 미래를 더 걱정한다. 물리적으로는 가족과 떨어져 살아도,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그들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못 먹어도 고!”를 외치며 나만의 길을 가는 삶을 꿈꾸지만, 실제로는 주변의 ‘사회적 합의’ 없이는 한 발짝도 떼지 못한다. 홍상수 감독은 내가 그렇게도 동경했던 하동화를 무너뜨린다. 그것도 아주 천천히, 집요하게.


자연이3.jpeg 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애인 주희를 시작으로 아버지, 어머니, 언니까지 모두가 나서서 동화를 ‘긁기’ 시작한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사실을 당연하게 여기는 동화에게 “모르는 걸로 도피하는 것 같다”, “그래도 조금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고 일침을 놓고, “중고차는 중고차일 뿐”이라며 그가 차에 부여한 의미마저 깎아내린다. 심지어는 “밤에 꽃이 피면 환해지고 무섭지 않아요”라는 그의 시조차 “너무 짧다”며 일축해버린다. 그 모든 ‘긁힘’을 허허실실 넘기던 동화는, “뒤에 변호사 아버지가 있으니까”라는 주희 언니의 말에 결국 폭발하고 마는데. 그 순간, 나의 추구미가 무너졌다. 세상의 평가에 초연할 줄 알았던 동화가 자격지심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그는 세상을 꿰뚫고도 흔들리지 않는 인물이 아니었다. 그저 현실을 회피하고 싶은, 나약한 한 사람일 뿐이었다.


감독은 그렇게, 관객이 동일시하던 인물이 사실은 자신과 다르지 않은 약하고 추한 존재임을 차근차근 들춰낸다. 동화는 끝까지 문제를 회피한다. 술에 취해 벌인 소동에도 애인의 가족에게 사과 한마디 하지 못하고, 이른 아침 짐을 챙겨 도망치듯 떠난다. 어쩌면 그의 인생은 늘 그렇게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고 피해 온 연속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내가 동경했던 추구미의 민낯을 보게 되었다.


감독은 “어차피 다 알 수 없으니 몰라도 된다”는 하동화식 태도를 낱낱이 해부하며 말한다. 세상은 모른다고 해서 피해갈 수 있는 게 아니며, 무책임한 무지는 반드시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마련이라고. 결국 동화는 잘 보이지도 않는 밤에 피는 꽃을 좇다 넘어지고, 길 한복판에 멈춘 ‘똥차’ 안에 앉아 “이제는 바꿔야 할 때”라고 말하며 스스로를 자조한다. 이 영화를 통해 내가 깨달은 것은 단순히 ‘그 감독이 내게 뭐라고 한 것’ 이상의 것이다. 이상을 좇기 전, 먼저 현실을 직면하고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삶을 살아가는 방식임을 말이다. 내가 진정 나만의 바이브를 찾고자 한다면, 세상을 피해 다닐 것이 아니라, 끝내 마주하며 살아내야 한다는 것 또한.

작가의 이전글영화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_예술가의 삶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