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도롱
영화 <국보> 는 유명한 가부키 명장의 집안에서 대를 이어야 하는 슌스케와 아버지를 잃고 그 집안에 맡겨져 자라게 된 기쿠오 사이의 라이벌 구도를 대서사적으로 그린다. 가부키 공연의 주인 자리는 당연히 슌스케의 몫이었지만 굴러온 돌인 기쿠오의 실력이 훨씬 뛰어나면서 슌스케는 그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반면 기쿠오는 타고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를 가로막는 단 하나의 장벽 가부키 집안의 피가 자기에게 없다는 사실 앞에 절망한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너의 피를 마시고 싶다’ 고 표현할 정도로 출신의 벽이 재능보다 앞서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기쿠오에게 그 피만 있다면 국보가 되는 길이 열릴 텐데 시대가 정해놓은 질서는 그에게 절대로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영화는 주로 기쿠오를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나는 기쿠오보다 슌스케의 운명에 더 마음이 갔다 슌스케는 아마 자기 재능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가부키 가문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가부키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을 테고 그마저도 기쿠오 때문에 잃을지 모른다는 위기가 그를 더 비극적으로 감정이 이입이 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는 가부키 말고도 더 많은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대와 그놈의 피 때문에
가부키가 자신의 천직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온 것 일수도 있다.
어렸을 때 할아버지 집에 가면 이상한 찜찜함이 있었다 사촌들을 만나고 친척들에게 인사하고 용돈을 받는 즐거움 보다 할아버지와 마주한다는 부담 때문이었다. 장손이라는 이유로 밥상에서도 큰 상에 할아버지와 마주 앉아야 했고 작은 상에는 할머니 누나 고모 엄마 등 여자 식구들이 모여 앉았다 마음은 늘 저 작은 상 쪽에 가 있었지만 나는 갈 수 없었다. 남자이기 때문에 집안의 유일한 장손이기 때문에 그것이 자연스럽다고 여겨지는 집 안의 분위기 속에서 나만 늘 부자연스러운 존재로 생각이 들었다.
식사 시간이 끝나면 그제야 숨 좀 돌릴 수 있을까 싶었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할머니가 할아버지 방에 가서 말동무를 해드리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거절은 할 수 없기에 재미없는, 민요 방송을 보고 있는 할아버지 옆자리에 앉아 시간을 버티곤 했다. 눈치를 보며 방에서 나갈 타이밍만 재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서재에서 책자를 가져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것은 바로 집안의 연명부다. 전통 있는 00김가의 몇 대손인지, 내가 얼마나 가치 있 는 집안에서 태어났는지 할아버지의 일장 연설로 들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죄송하지만 저는 이 유서깊은 집안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그 대는 아마 저로 인해 끊어질지도 몰라요. 그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장손이기에 누린 혜택은 분명하지만 그 타이틀에 내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늘 죄책 감을 느껴야만 했다 장손 같지 않은 장손. 그렇다고 그 장손이라는 자리를 스스로 벗어날 수도 없었고, 결국 받아들인 채로 살아왔다. 집안에 맞지 않고 공부 못하고 능력이 없는 장손으로서 십수년간 이어진 그 무게를 지고 살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그 짐을 조금씩 내려놓을 수 있었다.
시대가 허락하지 않는 피의 무게를 끝내 지고 살아가야만 했던 슌스케. 그와 달리 지금의 나는 시대를 핑계 삼지 않아 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삶을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갈 수 있는 시대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하지만 문득 이렇게 살아도 될까. 내가 집안의 수치가 아닐까 하는 아주 손톱만큼의 죄스러움이 찾아올 때가 있다. 그럴때면 다시 생각을 고쳐 먹는데. 그래도 어떻게 하겠나 수십 수백번 고민해도 결과는 같다 피와 나 모두를 만족할 수 없 다면 나 나라도 행복해야지.
피는 피일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