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라트>_통각으로서의 영화

by 미니

by 퀴어씨네클럽

평소에 팔레스타인 분쟁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영화를 챙겨보는 편이다. 당장 몇주 전에도 2001년 가자지구의 모습을 담은 <하산과 가자에서>라는 제목의 다큐를 보았다. 영화는 감독이 과거 감옥에서 만났던 수감 동지를 만나기 위해 가자로 향했던 모습을 담아둔 테이프를 20년이 지나 우연히 발견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 영상 속에는 감독과 동행했던 현지 가이드를 비롯해 당시 가자 시민들의 모습이 두서없이 담겨있다. 그리고 영화는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행방은 지금 전혀 알 수 없다”는 문장과 함께 끝난다. 영상 속 수많은 이름 모를 얼굴들과 그 마지막 문장이 남겼던 고통이 어찌나 컸는지 다음날까지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렇게 난 새해 벽두부터 2001년의 영상 속에 담긴 총성이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라는 사실 앞에서 너무나 큰 무력감을 마주했다.


시라트7.jpeg 영화<시라트>에서


그런데 이렇게 매번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난 왜 관련된 영화를 찾아보는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전에 영화 <시라트>를 논해보자. 영화는 사라진 딸을 찾아나선 아버지와 아들이 사막에서 레이브를 즐기는 무리와 동행하게 되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유사가족으로 변모해간다. 그러나 군인들을 피해 차를 몰고 올라간 산길 위에서 아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군인들이 심어놓았을 지뢰에 인물들이 처참히 희생당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영화는 명백히 전쟁과 군사주의를 겨냥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살아남은 이들이 오른 기차 위에 피란길에 오른 것으로 보이는 수많은 아프리카 현지인들의 모습을 함께 보여주면서 누군가에게는 고작 며칠이었던 악몽이 어떤 이들에게는 일상임을 주지시킨다. 영화가 배경으로 삼고 있는 서사하라 분쟁 지역을 비롯해, 팔레스타인, 우크라이나에 이르기까지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 매일매일이 지뢰 위라는 게 어떤 이들에게는 은유가 아님을 그렇게 관객은 깨닫는다.

시라트8.jpeg 영화<시라트>에서


지금 당장 뉴스를 틀면 전쟁 관련 소식이 어김없이 흘러나오지만 우리는 무감하다. 리듬 없이 비트만을 고르게 반복시킴으로써 듣는 이를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이르게 하는 테크노 음악처럼, 뉴스에서 매일 같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 종말의 사운드에 우리는 어느덧 익숙해져가고 있다. <시라트>는 이 무감함을 향해 시각과 청각을 아우르는 신체적 고통을 안기며 전쟁을 말 그대로 실감케 한다. 영화를 두 번째로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서조차 엄청난 편두통이 내 머리를 때렸던 것처럼,


<시라트>는 실존적으로 전쟁을 느끼게끔 하는 일종의 통각으로서의 영화로 기능한다.


그 고통 앞에서 나는 앞선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현실을 잊지 않기 위해, 즉 무감해지지 않기 위해 무기력감이라는 고통을 가하는 다큐들을 의식적으로라도 찾았던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없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 또 누군가는 도덕적 우월감이라도 느끼려는 거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만 인간은 타인에게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지금 당장 무얼 할 수 없더라도 수많은 타인의 고통과 죽음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른 채 산다면 그 자체로 너무 비참하지 않은가.

영화의 제목인 ‘시라트’는 천국과 지옥을 이어주는,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칼날보다 날카로운 다리를 뜻한다고 한다. 영화의 마지막에 그들이 타고 가던 기차가 향하는 곳은 과연 천국일까 지옥일까. 영화는 답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여길 수 있는 이들이 있는 세상이라면,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세상은 지옥이 아닌 천국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 점에서 현재진행형으로서의 전쟁을 보여줌으로써 해피엔딩을 떠올리기 힘든 다큐멘터리와는 달리, <시라트>는 고통 이후의 세상을 관객으로 하여금 상상하게끔 한다는 점에서 극영화로서의 미덕을 다하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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