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9 줄기과의 직장인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고, 뿌리도 아니고, 잎도 아니다. 사업을 넓히는 클라이언트나 작업을 깊게 하는 외주용역계약자와는 입장이 다르다. 나는 흡수할 수 있는 자본을 끌어올리고 적정하게 분배하여 크고 작은 성과들이 열릴 때까지 최선을 다해 지지해야 하는 줄기과의 직장인이다.
이 일을 하면서 타고난 성향을 못 누르고 갈피를 못 잡을 때가 있다. 들어가는 돈만큼 클라이언트의 입김이 세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자본을 제공하는 클라이언트보다 개인의 능력을 제공하는 외주용역계약자 분들께 마음이 기울곤 한다.
그 사이에 서서 의견을 잘 조율하는 것도 나의 주요 업무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통신사 기지국 같은 역할, 그 역할을 잘해내야 프로젝트 진행에 무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나의 역량이 부족해서 발생되진 않는다. 중요한 결정들은 꼭 합의를 거쳐야 하고, 각자가 처한 상황이 다른데 이해를 못해서 야기되는 문제가 대부분이다.
한동안 나는 내가 맡은 모든 업무가 말만 합의일 뿐 실은 통보의 연속인 일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 일의 주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뭔가 하는 무기력함이 파고들 때. 겨우 또는 고작 같은 말들이 열심히 하는 마음에 엉겨붙을 때. 스스로 일의 책임을 다하면서 순간순간 보람을 느끼게 하는 건 가벼운 바람처럼 내 최선을 살랑이게 하는 말들이었다.
그 발화점은 클라이언트일 수도 있고, 외주근로계약자일 수도 있고, 나와 같은 줄기과의 직장인일 수도 있다. 내가 하는 일과 이어져 있는 사람들의 말들이 고스란히 나를 스쳐가는 구조 속에서 내가 가져야 하는 일의 태도는 줄기를 유연하고 질기게 가져가는 것.
끊임없이 쏟아지는 피드백을 가뭄에 쏟아지는 단비처럼, 끊임없이 파고드는 문의사항을 겨우내 뭉친 주변 흙을 풀어주는 괭이처럼 여기고 나아갈 수 있을까.
내가 이 일을 하면서 듣고 싶은 말은 함께 일해서 다행이라는 말인데, 그 말을 들으려면 나의 일처리가 믿을 수 있는 과정들로 거듭나야 한다.
상대가 나의 일처리를 믿는다는 핑계로 귀찮은 자기 일을 잔뜩 떠넘기기만 할 때. 상대가 나의 일처리를 믿지 않아 어떤 일도 제대로 맡기려 하지 않을 때. 일하고 싶은 마음은 저절로 달아나게 되어 있다.
줄기는 줄기의 일을 한다. 꽃도 아니고, 열매도 아니고, 뿌리도 아니고, 잎도 아니지만 그 모두에 닿아 있는 줄기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추신, 안녕하세요. 만물박사 김민지입니다. 해 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네요. 요즘은 어떤 기분으로 잠들었다가 일어나시나요. 저는 최근에 꿈을 안 꾸고 일어나는 날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대개 현실이 반영된 꿈들이라 늘 무언가 미션을 받고 헤매는 도중에 깨어납니다. 꿈에 남은 제가 어떤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이번 글 끝에는 매년 이맘때 생각나서 찾아 듣게 되는 노래 한 곡을 두고 갑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