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샌프란시스코 여행기
세 달 정도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뉴욕에서 30일 새벽 6시에 이륙하여 샌프란시스코를 경유하여 한국에 12월 1일 오후 4시에 착륙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도착한 것은 이틀이나 지연된 12월 3일 오후 4시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고 하면 유나이티드가 유나이티드 했다고 해야할까. 오래 전 승무원이 중국인 승객을 때려가며 강제로 비행기 밖으로 끌어내는 영상을 본 뒤로 절대 타지 않고 싶던 유나이티드였지만 정말 티켓을 살 무렵엔 어쩐 일인지 유나이티드 밖에 선택이 없었다. (물론 돈이 없어 늘 가장 싼 1회 경유 이코노미 석을 타는 나에겐 말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꼈다. 백만원을 더 내서라도 절대로 유나이티드를 타지 않겠노라고.
첫번째 지연
지연될 것이면서 시간은 또 왜 이리 일찍 계획했었는지, 내 비행기는 새벽 6시 비행기였다. 뉴저지의 EWR 공항이었고, 셀프수하물 체크인 시스템 덕에 거의 공항에 도착한지 30분도 안돼서 4시쯤 게이트 앞으로 도착했다. 게이트에 첫번째로 도착한 것은 또 처음이어서 아무도 없는 이 게이트가 맞나 싶었지만 슬슬 한두명이 몰려왔고 다같이 숙면모드로 게이트앞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다들 나처럼 새벽 세시쯤은 기상해서 왔을 것이다.
게이트가 열릴 시간이 되었는데도 문은 열리지 않았고, 40분 정도 지연이 되어 슬슬 승객들이 경유 비행기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탑승을 시작해서 40분 정도면 빨리 비행해서 따라잡지 않을까 싶어 그때까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알아서 스무스한 환승을 준비해놨겠지, 국제선 환승이니 짐도 다시 체크인 안해도 되니까, 10분만 여유있어도 달려가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았는데, 엔진 점검을 해야한다느니, 엔진 2번이 안되면 1번을 쓸 수 있게 조치를 하고 있는데 종종 있는 일이다, 블라블라 하더니 결국엔 승객들이 게이트로 다시 나와야한다고 했다. 탔던 비행기를 내리는 이런 상황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미 그 때는 1시간이 넘게 지연된 상황이었고, 나를 포함한 여러 승객이 환승 비행기를 놓친 것을 거의 확정하는 시기였다.
모두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10분도 안되어 또 기장이 무슨 영웅이라도 되는 듯이 이제 다 괜찮다고 뿌듯해하며 다시 타라고 했다. 이 비행기를 타면 환승행은 놓친게 확실한데, 뭐 어떻게 해야하는거지? 싶어 앞에 직원에게 물어봤는데 황당하게도 '이 비행기를 타는 건 너의 선택이야. 고객 서비스 센터에 가면 다른 비행기를 알아봐주긴 할 건데, 언제가 될 진 우선 우리는 몰라.'라고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우선 이 비행기를 지금 안타면 수하물의 행선지가 꼬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시 그 비행기에 올랐다. 좌석 느낌이 다른 것을 보니 비행기를 바꾼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짜증이 나면서도 그래도 뭐 공중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보다야 지연이 낫지, 하며 침착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며 다음 계획을 세웠다. 방송에서는 내리면 다음 비행기로 자동으로 예약이 되어있을 것이니 내려서 직원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지연돼서 속도를 더 낼 줄 알았는데, 똑같이 여섯시간이 걸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재탑승 할 때부터 나에게 한국인이냐며 묻고 한국인이라고 하자마자 다짜고짜 나에게 의지하며 따라다니는 노부부를 인도해가면서 도착하자마자 우리 셋의 호텔과 식권을 받아냈고, 다음날 오전 10시로 예약된 새로운 탑승권을 받았다. 15불짜리 식권 6개와 호텔,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를 보고 갈 수 있는 오후의 시간, 그래도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하며 호텔로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이미 어두워진 네시에 호텔을 나서 시내로 향했다.
샌프란시스코 반나절 여행기
LA와 샌디에고를 가보고 서부에 푹 빠져 샌프란시스코도 언젠간 가보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그래서 유나이티드를 예약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잘못돼도 샌프란시스코야, 하는 기대가 조금 있긴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렇게 샌프란시스코를 공짜로 반나절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은근 그 상황이 웃겼고, 무조건 나가서 코딱지만한 구석이라도 보고 와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뜻밖의 여행. 이 한정된 시간 속에서 어딜 봐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정해야 했다. 그건 어렵지 않았다. 나의 단순한 여행법, 독립 서점과 비건 음식점을 찾는다. 그럼 거의 높은 확률로 힙한 동네가 나온다. 나는 어디선가 샌프란시스코에 훌륭한 라멘맛집이 있다고 들었던 것이 또 기억나 라멘맛집과 독립서점을 찾았다. 30분 검색을 한 뒤 지도에 'Marufuku Ramen', 'Dog Eared Books', 'City Lights Booksellers' 이렇게 세군데를 표시하고 길을 나섰다.
버스를 기다리는데 지나가는 차들이 왠지 정류장에 서있는 나를 굉장히 이상하게 보는 눈빛 같은 것이 느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억나지 않았다. 미국 서부에서의 대중교통이 어떤 의미인지. 버스를 타고, 5달러를 내밀며 현금도 받냐고 묻는 나에게 기사는 클리퍼는 없는지, 잔돈이 없으면 그냥 가서 앉으라고 했다. 클리퍼는 우리나라 티머니 같은 것으로 샌프란시스코 교통카드이다. 그래서 나는 운좋게 그냥 앉아서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역까지 가는 풍경은 마치 뉴질랜드 같았다. 낮은 개인주택들과 평원과 언덕들과 한산한 길이 조용하고 아름다웠다. 역에서 내려 클리퍼카드를 사서 충전하여 시내로 가는 기차를 탔다. 역도 뉴욕보다 깨끗하고, 역시 샌프란시스코는 좋다~ 생각하다 기차를 타고 놀랐다. 시트는 거의 다 뜯어져가고, 좌석이 한자리씩 일렬로 되어 있는 부분도 있는데, 너무 분위기가 싸늘했다. 그렇지.. 서부는 웬만하면 다들 운전을 하지. 그제서야 생각났다. 서부에서 대중들은 차를 몰고 다니며 대중교통이라는 것은 정말 빈곤층을 위한 것임을. LA에서도 버스는 탔지만 지하철은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뉴욕에 적응되어서인지 그렇게 무서운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여행 중에 특별히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음산함을 느꼈을 뿐.. 기차에서 본 풍경 또한 다닥다닥 붙어있는 생기 없는 집들의 풍경이 음울했다.
'24th Street Mission'역에서 내려 드디어 샌프란시스코의 도심을 마주했다. 샌프란시스코, 좋아할 줄 알았지만,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좋았다. 뉴질랜드와 밴쿠버에서 느꼈던 그런 인상이었는데, 소탈하고 자유로우면서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낮은 건물들과 작고 특색있는 가게들이 즐비했고, 길에는 한 레즈비언 커플이 격렬한 키스를 하고있었다. 이제 막 도시를 걷기 시작했는데, 저물어가는 해가 시작부터 너무 아쉬웠다.
내가 목적지로 찍어두었던 Dog Eared Books로 가는 길에는 흥미로운 상점들이 정말 많았다. 큐레이팅이 잘된 소품샵들이 정말 많았는데 'Needles and Pens'라는 샵의 머리핀들과 그 바로 옆 예사롭지 않던 쥬얼리샵 'Love & Luxe'의 액세서리는 서두르느라 제대로 보지못하고 왔지만 돌아간다면 꼭 몇 개 사오고 싶다. 'Audrey'라는 여성 의류 상점에도 들어가보았는데, 배우같이 예쁜 여자아이가 드레스를 피팅하며 친구와 뭘 사야할지 열심히 고르고 있었는데, 입는 것마다 다 예뻐서 그냥 무조건 다 사라고 해주고싶었다. 프랑스 여자들이 많이 입을 것 같은 꽃무늬 원피스 류가 많았고, 가격도 괜찮아서 나도 두개를 사왔는데, 집에 와서 입어보니 볼 수록 마음에 들어 여기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 밖에도 'Mission: Comics and Art'라는 만화책방과 일본 소품들이 적절히 섞여있던 'Topdrawer'라는 소품샵도 너무 좋았다. 그냥 한마디로 들어가 본 곳마다 너무 좋았다. Dog Eared Books라는 서점이 그 곳으로 이끈 것이었지만 그 서점에는 가장 짧게 머물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그래도 휙 둘러보는 와중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 라던가 <대도시의 사랑법> 등 우리나라 번역서가 잘 보이는 곳에 큐레이팅 되어있는 것이 신기하고 기뻤다.
오드리라는 의류집 주인이 이 미션로드는 부리또가 유명한 곳이라고 추천해주었지만, 검색해서 찾아놓은 라멘이 너무 먹고싶어 북쪽을 향해 걸었다. 지쳐서 60번 버스를 탔는데, 아까처럼 잔돈이 없으면 그냥 타라고 해서 또 공짜로 탔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버스 공짜로 타는 법: 5불을 흔들며 현금도 받는지 묻는다.) 더 관광지가 많은 북쪽으로 올라와서 더 북적북적하거나 큰 곳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라멘집이 있는 구역은 그렇게 인상적이진 않았다. 다만 엄청나게 일본스러운 몰이 있었고, 그 시간쯤 대부분의 가게는 문이 닫혀있었지만 꽤나 진심으로 일본스러웠다. 가게는 찐맛집이었는지 내가 가니 이미 앞에 대기가 어마어마했고, 예약 시스템에 번호를 입력하니 40분을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그래도 왠지 다른 것을 먹고 실망하고 싶지 않아 몰을 구경하며 기다렸다. 라멘은 정말 기다린 보람이 있을 정도로 맛있었다. 통으로 나온 고기가 부담스러웠는데 먹어보니 굉장히 부드러웠고, 적당히 매콤해서 여태 내가 먹어본 라멘 중에 가장 맛있었다. 후다닥 먹고 북쪽의 해안을 구경하려 했지만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리프트를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이때까진 정말 행복했다. 내가 이것을 보려고 오늘 이렇게 지연됐구나 생각할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