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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짐자무 Mar 06. 2021

뉴욕 01_우리의 점이 겹칠 때

New York, US_When our dots overlap



그 날 분명, 뉴욕 행 비행기를 기다리던 베를린 공항에서 나의 인연의 끈들이 출렁였다. 그 날은 베를린에서 함께 하던 남자친구와 헤어지는 날이었다. 1년 정도 함께 했던 우리는 서로 남기지도 떠나지도 않도록 같은 날 다른 나라로 떠나기로 했다. 그는 런던으로, 나는 뉴욕으로 향했다. 그의 비행기가 더 이른 시간에 떠나 출국 라인에서 서로 웃으며 인사를 했고 그는 떠났다. 우리는 이미 이주 전부터 시도 때도 없이 펑펑 울었기 때문에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내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행이 12시간 지연되었다는 안내를 받았다. 체크인까지 마치고 수하물도 모두 맡겼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어안이 벙벙했다. 공항에는 해당 항공사 직원조차 없어서 매우 화가 났다. 마침 그 항공사 부스에 인도여자가 전화로 문의를 하고 있어서 다가갔다. 나는 베를린에 있을 때 번호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내 또래의 그 여자, 라디카는 며칠 더 머물게 되면 관광비자가 만료되는 상태라 더 다급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일을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다 우리는 한 미국남자에게 다가가 당신도 이 비행기에 탔어야 했냐고 물었고 그렇게 한 팀이 되었다. 지연된 시간 동안 무료로 제공된 호텔에 짐을 놓고 우리는 남은 하루의 오후 동안 베를린을 같이 돌아다녔다. 사실 그 날 나는 내내 속이 울렁거릴 정도로 기분이 최악이었기 때문에 그날의 베를린 여행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라디카가 너무나도 온화하고 다정해서 그 최악의 기분에 위로가 많이 되었다는 것 정도만 기억난다. 미국소년 맷은 영화 등을 촬영하는 카메라맨이었는데 공항을 나오면서 풍경이 너무 아름답지 않냐며 이 장면이 슬로우모션으로 영상에 담기는 것이 그려진다며 묘사했던 것도 기억이 난다. 우리는 다음날 아침 경유지인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에서 흩어져 라디카는 인도로, 맷은 엘에이로, 나는 뉴욕으로 향했다.




낯선 문화권의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은 그 집단에 대한 편견을 한 순간에 없앨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뉴욕에 도착한 첫날 나의 첫 유대인 친구 Y를 만났다. "너 왜 이렇게 귀여워!" 날 처음 본 Y는 이렇게 말하며 강아지를 들 듯 겨드랑이 쪽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마른 그의 몸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다 커서 이십 대 후반에 그렇게 들어 올려진 적은 처음이라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막 가족모임에서 돌아와 중절모를 쓰고 옆머리를 말고 유대인 옷차림을 하고 있던 것도 신기했다. 그게 그의 첫인상이었다. 친구의 소개를 받아 브루클린의 그의 집에서 이주 동안 묵게 되었다. 집까지 오는데 별 문제는 없었는지, 저녁은 먹었는지, 지연됐다는 짐은 어떻게 되었는지 정신없이 이것저것 묻고 챙겨주었다. 그렇다. 내 짐은 뉴욕에 도착하고 나서도 지연이 되어 내 숙소로 하루 뒤에 배달이 될 예정이었다. 후에 비행이 지연된 것에 대해 60만 원 정도의 보상을 받고 화가 누그러지긴 했다. 그는 채식주의자였고, 성인 ADHD가 있었으며, 미국인답게 이혼경력이 있었다. 가끔 집에 그가 있냐며 지나가다 들르는 유대인 친구들도 있었다. 가끔 그와 그의 친구들을 마주치면 조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는데 엄숙하고 진지해 보이는 옷차림을 한 그 유대인들은 알고 보니 매우 웃긴 사람들이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염세적인 말투였고, 될 대로 돼라는 식의 자세였으며 예상했던 대로 그들은 돈이 많은 것 같았다. 어쩐 이유로 Y는 운전면허증이 취소되었지만 종종 밤에 오토바이를 몰고 나갔고, 그는 집에 거의 없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고는 참 그 다운 행동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 자신도 종종 자신의 인생은 난장판이라며 웃으면서 얘기하곤 했다. 웃어넘겨야지 뭐 어쩌겠어, 하면서.


아무튼 덕분에 브루클린의 그 집을 거의 내 집처럼 혼자 사용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매일 아침 그가 운영하는 바로 옆의 카페에서 아침식사로 베이글과 커피를 마셨다. 정말 식욕이 없던 우울한 시기였는데 그는 나에게 마치 아이를 다루듯 베이글을 모두 먹을 때까지 안 일어나겠다며 베이글에 크림치즈를 발라주며 먹으라고 했다. 그는 많아야 고작 나보다 다섯 살이 많았는데 자신의 아들과 내가 키가 비슷해서인지 자꾸 내 나이를 잊는 듯했다. 집의 뒷마당이자 카페의 뒷마당은 그가 만든 테이블과 의자로 채워져 있었고 멀베리가 잔뜩 열려있는 그곳에 앉아있으면 머리와 허벅지 위로 하나 둘 보라색 열매가 떨어졌다. 베를린에서 건 멀베리를 아침 시리얼에 얹어 먹곤 했는데 그곳에선 비쌌던 그 멀베리가 여기에 잔뜩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물청소를 해야 할 정도였다. 손님들은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며 어울리는 것을 즐겼다. 손님들은 모두가 그의 친구인 듯했다. 다리가 내 어깨까지 오는 이집, 보드를 타고 다니는 중년의 멋쟁이 아저씨, 위층에 사는 토니 등을 알게 되었고 종종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토니는 "안녕 나는 (발가락toe을 가리키며) 토To, (무릎knee을 가리키며) 니ny야." 라며 내가 여태 본 첫인사 중 가장 깜찍한 인사를 했다. 그리고 사실 자신도 이렇게 자기소개를 해본 적은 없다고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다리가 긴 이집은 한국에서 모델을 하고 싶다고 했으며 보드를 타고 다니는 멋진 아저씨는 뉴욕의 비싼 담배값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다른 주에서 들여오는 싼 담배를 파는 곳을 알려주었다. 뒷마당의 모두, 아니 뉴욕의 모두는 나에게 너무 친절했다. 마치 이별을 겪은 나에게 우리가 모두 너의 친구야,라고 말하는 듯했다. 뉴욕에서는 지나가던 경찰도, 공사장 인부도 하우아유 두잉! 하며 멀찍이에서도 말을 걸었다. 베를린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나보고 말하는 거냐며 두리번거리자 아이고 최고의 리액션이라며 다가와 안부를 물었고 경찰과 기념촬영까지 하고 헤어졌다. 뉴질랜드에 돌아온 것 같이 긴장이 슬슬 풀렸다.




뉴욕에 도착한 지 열흘쯤 되었던 날, 그날도 어김없이 외출하기 전 뒷마당에서 커피와 베이글을 먹고 있었다. 그런데 맷이 그 카페 뒷마당으로 들어왔다. 베를린에서 같이 비행기가 연착되었던, LA로 갔던 그 맷이었다. 영상작업을 하러 어제 뉴욕에 왔다며, 옆에 있는 친구가 이 카페로 데려왔다고 했다. 우리는 영화를 너무 많이 본 탓인지 그닥 놀라워하지 않았고 간단히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할 말도, 묻고 싶은 것도 없었다. 오히려 옆의 친구들이 더 신기해했던 것 같다. 이상할 만큼 태연하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지만 가끔 그 순간을 생각해보면 정말 드문 확률의 순간이었다.


회사 동료 중에 자기 부부가 처음 만났던 인연을 이야기하며, 학교 선배였던 남편이 자신이 놀러 갔던 동해 바닷가에 마침 놀러 와 마주쳤다며 너무 신기하지 않냐고 한 적이 있다. 하필 같은 시간에 어느 장소에서 우연히 만나 운명적인 인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맷과의 이 사건을 통해, 서부 끝의 엘에이에 사는 맷을 동부 끝의 뉴욕에서, 특정한 카페 뒷마당에서 마주쳐도 전혀 감흥이 없던 우리 둘을 떠올리며, 그런 것도 역시 모두 의식의 영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우연도 서로의 호감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서울_01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같이 비행기를 놓쳤던 인도소녀 라디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자신의 회사 동료 L이 한국으로 일하러 온다고, 계약 전에 잠시 며칠 들를 예정인데 서울을 보여줄 수 있냐는 연락을 받았다. 라디카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었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L의 이름만 안 채로 서로 왓츠앱을 통해 연락을 해서 을지로에서 만나기로 했다. 2018년 5월, 그 날은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 몇십 미터 앞도 잘 안 보일 정도였다. 그는 왓츠앱의 위치 공유 기능을 제안했다.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었는데 우버를 기다릴 때처럼 서로의 위치가 점으로 나타나 스크린 위에서 실시간으로 움직였다. 뿌연 거리 속에서 스크린의 점에 의지하여 상대방 쪽으로 걸어갔다. 휴대폰 스크린만 쳐다보느라 서로를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 인사를 했다. 현실의 인물로 진화한 2D의 점을 목격하는 것 같았다.


인도인일 줄 알았던 L은 영국에서 자란 라트비아인이었다. 라트비아의 수도가 리가인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그 후 한국에서 일 년 동안 일을 하게 되어 한 때 매주 토요일 저녁을 같이 먹곤 했다. 주로 종로나 한강진 쪽을 걸어 다니며 이야기를 했다. 그는 몇 달간 한국어 수업을 듣기도 했는데 자꾸 ‘오이’ 외에는 아무 말도 할 줄 몰라 억대 연봉의 그 기업에 도대체 어떻게 입사한 것이냐고 놀렸다. 나는 그래도 한국어를 가르쳐주겠다며 실용 한국어, 주로 욕을 가르쳐주었다. 내가 알려준 욕은 주로 야근할 때 많이 써먹었다고 했다. 자신의 ‘시발’과 ‘조까따’로 모두의 야근 피로를 풀어주었다고 해서 나는 경악하며 폭소했다. 사실 그는 라디카와 그렇게 잘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회사 워크숍으로 한번 본 사이었고, 라디카가 색색 펜을 이용하며 굉장히 정성스럽게 필기하던 것만 기억난다고 했다. 참 라디카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 년이 지나 L이 영국으로 돌아가고 어느 날 전화가 왔다. 그에겐 센티멘탈한 새벽 두 시였겠지만 나에겐 아침 회의가 막 끝난 월요일 오전이었다. 서울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영국에 오면 꼭, 메이비 말고 꼭, 연락하라고 했다. 평소에도 늘 무표정에 수줍음이 많아 술이 들어간 뒤에만 고마움을 표하던 그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그날도 러시안 스피릿이 발동하여 보드카를 마신 모양이었다. 사실 그가 나에게 서울을 보여줬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덕분에 나도 못 가본 곳들을 많이 걸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제 가장 한국적인 종로를 걸을 때 외국인 친구와의 추억이 가장 많이 생각이 날 정도이니까. 나는 늘 도시들을 떠나면서 떠나는 나의 슬픔만을 알 수 있었는데 그는 남겨진 친구의 슬픔을 알게 해주는 첫 친구였다. 떠날 무렵에 우리 집 근처인 에버랜드로 놀러 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마침 튤립을 파는 시기였다. 퍼레이드를 보고 꿈나라 같은 배경음악을 들으며 나오는 길에 출구의 튤립 코너를 지나는데 그는 잠시 기다려보라며 핑크색 튤립 한송이가 담긴 화분을 사다 주었다. 꼭 마지막 작별 선물 같아서 갑자기 실감이 나 슬펐다. 어린 시절 엄마들끼리의 대화가 끝나고 친구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슬픈 순간의 기분이었다. 친구와 쌍둥이로 태어나서 헤어지지 않고 계속 놀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아쉬움 말이다. 나는 분홍 튤립이 정말 우아한 게이 친구같이 생겼다고, 세바스티앙이라고 이름을 붙여주며 꼭 죽이지 않고 열심히 물을 먹이겠다고 농담을 했다.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친구가 떠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내가 떠날 때 친구들이 더 머물면 안 되냐고 말했을 때, 어떠한 애정과 용기가 담긴 말이었는지 그제야 이해했다. 그가 떠나는 날 나는 왓츠앱 위치 공유 화면처럼 우리의 위치를, 서로 멀어지는 두 점을 머릿속에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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